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국제사회의 모습은 자유주의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끝을 알 수 없습니다. 각국은 협력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앞세웁니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사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더욱 심화됐습니다.
계약 이전의 자연 상태를 무정부적 전쟁 상태와 같다고 본 영국 사회계약론자 홉스(Hobbs)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이런 관점을 ‘현실주의’라 부릅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하며 생존을 위한 힘의 대결을 추구한다는 이론입니다. 세력 균형이 깨지면 언제든지 약육강식의 쟁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현실주의자들의 시각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이 올해 안에 나올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이미 선진국들이 코로나19 백신을 입도선매하고 있다고 합니다. 후진국과 개발도상국들에 코로나19 백신은 ‘그림의 떡’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코로나19 백신 확보에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든 나라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이미 다국적 제약회사 화이자, 존슨앤드존슨 등과 계약해 7억 회 분량의 백신을 확보했습니다. 유럽 국가들과 일본, 중국, 브라질 등도 백신 확보전에 나섰습니다. 이들 국가가 지금까지 확보한 백신은 13억 회 분량입니다. 여기에 추가 구매 옵션까지 더하면 15억 회 분량을 더 확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최대 28억 회 분량의 백신이 이들 국가에 먼저 돌아가는 셈입니다.
2022년 1분기까지 전 세계 백신 생산 규모가 10억 회 분량으로 예상되는 점을 고려하면 백신 확보전에서 소외된 나라들은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백신 개발에 거금을 지원하면서 백신의 공공재화를 주창하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의 노력이 무색합니다. 1970년대 석유파동 때처럼 백신을 무기로 삼는 ‘백신 민족주의’가 출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 같은 상황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WHO는 공정하게 백신을 공급하자는 취지의 ‘코백스(COVAX)’ 구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70여 개 나라가 코백스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백신 민족주의는 좋지 않다. 백신을 공유하면 세계가 함께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고 경제 회복도 빨라질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