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개월 만의 우승 눈앞서 놓쳤지만 골프도 인생도 마라톤, 청춘이잖아
김종석 스포츠부장
암호처럼 보이는 로마숫자는 리디아 고(23)가 오른 손목에 새긴 문신이다. 프로 데뷔 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처음 우승한 날짜(2014년 4월 27일)를 의미한다. 당시 17세.
아직도 어린 나이지만 리디아 고는 요즘 ‘아 옛날이여’를 떠올리며 그 시절을 그리워할지 모르겠다. 세상 두려운 줄 모르고 질주하던 10대 때와 달리 20대 들어선 가시밭의 연속이다.
리디아 고의 이름 앞에는 늘 최연소, 최초라는 단어가 붙어 다녔다. 2015년 2월 18세 나이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남녀 통틀어 최연소. 15세 때인 2012년 아마추어 신분으로 LPGA투어 첫 승을 올린 뒤 10대에만 14개의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스윙, 클럽, 코치, 캐디 교체에 체중까지 빼며(8kg) 새 출발을 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다. 43개 대회에서 무관에 그치다 2018년 4월 15승 고지를 밟으며 눈물을 쏟은 뒤 다시 정상에서 멀어졌다.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다 자신의 모든 걸 태워버려 더 이상 뭔가를 할 육체적, 정신적 의욕이 사라진 ‘번아웃(Burnout·소진)’이 너무 일찍 찾아온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올해 코로나19로 5개월 쉬는 동안 그는 이를 깨물었다. 집에 실내자전거 같은 운동기구를 들여놓고 근육을 3kg 불리며 하체도 강화했다. 새 코치를 영입했고, 훈련량도 늘렸다. 이번에 1∼3라운드를 모두 1위로 마쳐 생애 첫 대회 4라운드 내내 선두를 지키는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의 기대감까지 키웠다.
그랬기에 역전패의 충격이 무척 컸으리라. 일본, 미국투어 신인왕 한희원 해설위원은 “준비를 많이 했는데 부담감을 못 이긴 것 같다.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니엘 강, 고진영 등 동료들은 ‘힘내라’며 위로를 보냈다. 리디아 고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 자신감을 얻었다”는 글을 남겼다.
세계 최강 한국 여자골프에서 선수 수명은 퍽 짧다. 2016년 이후 KLPGA투어 129개 대회에서 30대 챔피언은 6명뿐이다. 그나마 박인비, 전미정, 유소연을 뺀 순수 국내파는 3명. 우승자 평균 연령은 23.1세다. 이번 시즌 KLPGA투어 상금 랭킹 톱5 중 3명이 20세 이하다.
반면 장수하는 선수는 드물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운동만 하다 보니 부상이나 슬럼프에 쉽게 노출되지만 극복은 쉽지 않다. 롱런하려면 일과 생활의 균형도 중요하다. 흔들릴 때 잡아주는 가족, 친구의 존재도 소중하다. “골프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받쳐줘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 오래 뛸 수 있다.” 박인비의 조언이다.
리디아 고가 아쉬운 결과를 얻은 대회는 미국 정유회사 마라톤이 타이틀 스폰서다. 1930년 제정된 이 회사 슬로건은 ‘장거리에서 최고(Best in the long run)’. 첫 우승의 짜릿한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골프화 끈을 조였으면 좋겠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리디아 고뿐 아니라 다른 청춘에게도.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