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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4명중 1명꼴 성폭력 피해… ‘도움 요청’은 10%도 안돼[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0-08-21 03:00:00

범죄에 무방비 내몰린 탈북여성들




탈북여성 이송월(가명) 씨는 지난해 중순경 수도권 모처에서 남자친구가 성관계 장면을 몰래 촬영했다. 역시 탈북민인 남자친구는 휴대전화로 촬영한 동영상을 빌미로 헤어진 뒤부터 금전을 요구하는 등 이 씨를 협박했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이 씨가 문란한 성생활을 한다며 소셜미디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시달리던 이 씨의 상황은 최근 관리당국에 우연히 알려졌다. 이 씨는 “한국에서 탈북민 커뮤니티가 좁다 보니 같은 탈북민인 전 남자친구를 신고하는 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지난달 한 탈북여성이 자신의 신변보호 업무를 담당했던 서울의 한 경찰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뒤 탈북여성을 둘러싼 성폭력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3월 기준 우리나라에 입국해 있는 탈북민 3만3658명 가운데 여성(2만4256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72.1%. 1998년 12.2%(116명)에서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여성가족부가 2017년 조사한 결과, 한국에 정착한 뒤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은 25.2%나 된다. 4명 가운데 1명꼴로 성폭력을 경험한 셈이다.

동아일보가 만난 탈북여성 6명은 “한국에서 겪었던 위험들은 단순히 성폭력이란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탈북 과정에서도 다수의 성적 위협을 겪었다는 이들은 대부분 혈혈단신으로 낯선 한국 땅에 있다 보니 여러 유형의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다고 한다. 2014년 홀로 탈북한 A 씨(40)는 “남한에 온 동향 여성들이 의지할 곳을 찾기 힘들다 보니 연인이나 남편에게 쉽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약점을 노려 사람을 더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자유 찾아 떠났는데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


문제는 탈북여성 입장에선 범죄 피해를 입고도 경찰 등 바깥에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단 점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를 입은 탈북여성 가운데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대답한 경우는 9.7%뿐이었다. 심지어 ‘그냥 당하고 있었다’(12.9%)거나 ‘무조건 빌고 애원했다’(11.3%) 등 소극적 태도를 보인 사례가 훨씬 많았다. 배우자의 폭력을 경험한 탈북여성들도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다’고 답한 경우가 7.7%에 그쳤다.

탈북여성들이 각종 피해를 당하고도 외부로 사실을 알려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고하길 주저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몸에 밴 ‘북한식 사고방식’ 탓이 크다고 한다. B 씨(38)는 “북한에선 한국의 112처럼 피해를 당했을 때 신소(신고)하는 시스템 자체가 아예 없다. 북한에선 성폭행이 유죄로 판결나도 징역 3년이 최고형인 데다 성추행 등은 처벌 대상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그 역시 2016년 12월 자신이 살던 서울 은평구 빌라에서 사실혼 관계이던 남성에게 거의 초주검이 되도록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당시에도 사실을 눈치챈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겨우 구조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은 전근대적인 남성우월주의가 여전히 깊게 뿌리내려 있어 남성이 여성보다 지위가 높다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문제가 발생해도 피해자인 여성을 탓하는 풍조가 강하다. 굿로이어스 공익제보센터의 전수미 변호사는 “북한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어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며 “옆집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도 주변에선 ‘여자가 문란해서 그렇다’고 반응할 게 뻔하니 말을 못 한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도 이런 정서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 지적했다.

한국에 정착한 뒤에도 이런 북한식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관계자들은 여기서도 견고히 유지되는 ‘탈북민 커뮤니티’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익숙지 않은 남한사회에서 서로 돕고 관계를 맺는 건 나쁜 게 아니지만, 북한 체제의 습성까지 이어지는 면이 있다. C 씨(38)는 “피해를 알리는 걸 망신스럽게 생각하는 동향 지인들이 주변에 많다 보니 신고를 하려 해도 ‘왜 탈북민 이미지를 더 망치려 하느냐’며 오히려 핀잔을 주는 경우도 봤다”고 했다. 그는 “사실상 피해 사실을 숨기는 여성들이 많아 정부기관의 통계도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남북하나재단의 ‘2019 북한이탈주민 사회통합조사’에서 남성 탈북민의 배우자는 88.6%가 탈북여성이다. 탈북여성이 탈북남성보다 3배 이상 많은 점을 감안하면, 탈북민끼리 형성한 폐쇄적인 관계가 한국에 정착한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탈북여성 폭력, 대부분 생활고와 맞물려


“헤어진 남자친구가 매일같이 찾아와 ‘죽여버리겠다’며 협박하고 때려요. 한국에서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차라리 다시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지난달 수도권에 거주하는 탈북여성 이향월(가명·49) 씨는 지인인 다른 탈북민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놨다. 관리당국은 이 씨가 재입북 의사를 내비친 사실을 전해 듣고 조사에 나선 뒤에야 이 씨가 지속적인 데이트폭력에 시달려온 사정을 알게 됐다.

이 씨는 결별을 거부하는 한국인 남자친구의 협박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112에 신고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남자친구의 폭력은 형사처벌을 받은 뒤 더 심해졌다. “네가 감히 나를 신고했냐”며 이 씨가 사는 임대아파트와 비정규직인 직장을 찾아와 협박하고 손찌검하는 일이 더 늘어났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의 데이트폭력은 생활고와도 깊게 맞물려 있다. 이 씨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앓아온 만성 위궤양과 담석증 등 지병 탓에 한국에 와서도 여러 해 동안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왔다. 남자친구 역시 입원했던 병원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치료 과정에서 생활고가 심했던 이 씨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남자친구에게 의존했다가 폭력에 시달리게 됐다.

이 씨처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폭력의 굴레에 갇히는 경우는 적지 않다. 여성가족부 조사에서도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탈북여성 가운데 월평균 가구소득이 150만 원 미만인 경우가 56.3%였다. 탈북여성을 대상으로 결혼정보업체를 운영하는 D 씨(38·여)는 “북한에서 지녔던 자격 등을 인정받지 못하다 보니 한국에서 번듯한 직업을 가지기 어렵다. 빚을 갚으려 유흥업소 등에 내몰렸다가 폭력적인 남성을 만나게 되는 사례가 흔하다”고 했다.

“탈북여성분들이 겉으론 억센 척을 해도, 정(情)에 휘둘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수년간 피해를 입은 탈북여성들을 상대해온 한 상담센터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 마음을 준 이에게 쉽게 상처를 받아 자살 기도를 하거나, 감정을 속인 채 접근하는 이들의 범행 표적이 되기 쉽단 얘기다. 5월 16일 오후 1시경 경기 용인에서는 탈북여성 E 씨(23)가 교제하던 탈북민 남자친구(33)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E 씨는 직전에 소셜미디어에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고, 이를 발견한 친구가 112에 신고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온라인상에서 친분을 형성한 뒤 돈을 요구하는 사기 수법인 ‘로맨스 스캠’의 표적이 되는 이도 많다. 2월 6일 경기 하남에선 탈북여성(49)이 한 달여간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이 유엔 비밀요원이라는 상대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800달러(약 94만 원)를 해외 송금했다.



○ 하나원 범죄피해 예방교육 2시간뿐


탈북여성들은 이처럼 여러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처지지만,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에선 관련 교육이 충분치 않다. 탈북민들은 정착 초기 12주 동안 하나원에 입소해 기초 교육을 받는데, 성폭력 등과 관련된 수업은 모두 합쳐 7시간에 불과하다. 그것도 ‘여성 인권과 양성 평등’ 3시간과 ‘신변보호담당관 안내’ 2시간을 빼면 실제 ‘범죄피해 예방교육’은 2시간에 그친다.

“여성가족부나 통일부에서 탈북민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한다고 하죠. 하지만 여성부에 가니 ‘통일부나 남북하나재단에 가셔야 하지 않냐’며 돌려보냈어요. 탈북민 사이에서 통일부에서 소개해주는 공익변호사는 제 일처럼 챙겨주지 않아 ‘가봤자 소용없다’는 얘기가 파다해요. 솔직히 신변보호 경찰도 못 미덥긴 마찬가지고요.”

탈북여성 김모 씨(44)는 19일 동아일보와 통화하며 어느 순간 냉소적인 목소리로 바뀌었다. 이렇게 얘기해도 별로 바뀔 게 없다는 투였다. 다른 탈북여성들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하나원 교육부터 신변보호, 상담까지 그럴듯하게 형식적인 절차만 갖추지 말고 정말 현실적인 도움과 대안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한국사회는 2016년 탈북민 3만 명 시대를 맞았다. 자유와 인권을 찾아 목숨을 걸고 이곳에 온 여성들에게 한국은 어떤 세상으로 비치고 있을까.

한성희 chef@donga.com·김태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