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일본 도쿄의 한 댄스학원에서 고교생 10여 명이 ‘니쥬’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김범석 도쿄 특파원
니쥬의 멤버 9명은 모두 일본인이지만 기획사는 한국의 JYP엔터테인먼트이다. 이들의 춤, 패션, 활동 방식 모두 K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서 올해 3월에 데뷔한 남성 아이돌 그룹 ‘JO1’의 기획사 또한 한국의 CJ ENM이다. JO1 역시 K팝 특유의 ‘칼군무’를 잘 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최근 일본에서는 한류의 현지화가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한국 배우와 가수가 등장한 드라마와 노래를 통해 한류가 퍼졌지만 이제는 일본인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다른 일본인에게 한류를 전파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그 체계와 성공 노하우를 수출하는 수뇌부 역할을 맡는다.
실제 이날 댄스학원에서 만난 미호 양(18)은 “또래 일본 소녀들이 한국 가요를 부르고 한국어를 구사하는 모습 자체가 멋지다. 그래서 니쥬의 춤을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한국으로 건너가 댄서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보아, 동방신기 등이 활약했던 2000년대 초중반 상당수 일본인은 ‘이색적이다’ ‘일본에서 보기 드물다’며 한류를 일종의 ‘별미’로 취급했다. 기자 주변에도 ‘일본에 낯설고 독특한 한국 문화가 등장해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뒀다’는 식으로 평가한 일본인이 적지 않았다. 이제는 달라졌다. 미호 양처럼 한국의 원천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본인이 늘어나는 것이야말로 한류가 한때 유행이 아님을 보여 준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 공직사회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사뭇 달라졌다. 한 외무성 간부는 “외무성 안에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젊은 직원이 많다. 한국어를 ‘쿨’하고 ‘힙’하게 본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측근 역시 “BTS가 영어도 아닌 한국어 앨범으로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기록한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 등으로 악화된 한일 관계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는 한류가 양국 국민의 문화적 거리를 좁혀주지 않을까. 정치적으로는 도통 풀릴 기미가 안 보이는 얼어붙은 양국 관계를 풀 열쇠는 ‘문화’에 있는지도 모른다.
김범석 도쿄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