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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학대에 은둔…그들을 구한건 같은 경험의 또래들

입력 | 2020-08-22 03:00:00

은둔형 외톨이, 국내 30만명 넘어
스스로 마음 닫아 치유 힘들지만 벽을 깨도록 돕는 서포터 육성
“청취와 공감이 상처를 낫게 해”




정슬기(가명·26·여) 씨를 방으로 숨어들게 만든 건 어려서부터 반복된 아버지의 폭언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려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다. 게임 중독과 우울증이 심해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상태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침대로 방문을 막고 가족들에게 마음을 닫았다. 물건을 부수고 깨진 유리를 밟고 다니기도 했다. 은둔 9년 차, 정 씨가 가장 깊은 동굴로 들어갔을 때다.

2년 전 가족들은 결국 정 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동료 환자들과 친해지면서 서서히 마음 여는 법을 배웠다. 주치의는 정 씨가 검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외출을 허락하고, 공부도 가르쳐줬다. 은둔 10년 만에 세상으로 나올 용기를 낸 정 씨는 현재 간호조무사 과정을 준비 중이다. 그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은둔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씨처럼 은둔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 또 다른 은둔형 외톨이들을 돕기 위해 한데 뭉쳤다. 고립 청년들을 돕는 사회적 기업 K2인터내셔널과 서울 성북구가 지원하는 ‘은둔고수’ 양성 프로그램이다. 한 달 동안 상담 교육을 받은 뒤 또래 은둔형 외톨이를 찾아가 자립을 돕는 것이다. K2인터내셔널 오쿠사 미노루 교육팀장은 “은둔형 외톨이들은 외부의 도움에 경계심이 강하다”며 “같은 아픔이 있는 또래들은 공감의 폭이 넓어 상담과 치유에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20일 서울 성북구의 한 모임 공간. 상담사와 내담자로 역할을 나눠 질문하는 방법 등을 배우는 상담수업이 진행됐다. 처음 해 본 상담 실습에 질문은 자주 끊겼다.

“이 질문을 하면 당사자에게 상처가 될까 망설여져요”, “상담사는 해결책을 제시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어려움을 토로하는 참가자들에게 상담 교육을 맡은 박대령 이미아름다운당신 심리상담센터장이 노하우를 알려줬다. “질문을 망설이지 마세요.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질 만큼 구체적으로 질문하는 게 좋아요. 해결책은 내담자가 스스로 알고 있을 때도 많아요. 답을 알려주기보단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은둔고수 프로그램은 이들에게 남은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은둔 생활을 상징하는 단어를 적어 내라고 하자 ‘가정폭력’ ‘죄책감’ ‘완벽주의’ ‘근손실’ ‘쓰레기’ ‘신라면’ 등을 떠올렸다. 10대 때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어머니의 극단적인 선택을 목격하며 ‘심리적 은둔’에 빠졌었다는 한모 씨(20·여)는 “같은 경험이 있는 친구들을 만나며 과거의 나와 분리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은둔은 한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가족 전체를 고통에 빠뜨린다. 조모 씨(26·여)는 10년째 은둔 중인 동생을 세상으로 꺼내기 위해 이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조 씨는 “동생이 잔소리하는 나를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부를 정도로 갈등이 깊었다. 그럼에도 동생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한국보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규모가 큰 일본도 이 같은 서포터를 적극 양성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40∼64세 히키코모리 인구는 약 61만3000명으로 추산됐다. 전체 규모는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공식적인 정부 통계가 없다. 다만 2017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 결과 15∼39세의 약 4.2%가 은둔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신과 출산, 장애 등을 제외하고 스스로 은둔을 택한 경우로 한정하면 0.91% 수준. 주민등록 인구를 대입하면 13만5000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의 숫자일 뿐이다. 설문에 응하기를 꺼리는 은둔형 외톨이의 성향, 조사에서 제외된 40대 이상 세대를 고려하면 30만 명을 넘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산이다.

참가자들은 은둔형 외톨이들이 사회에 복귀하기 위한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0년 동안 은둔 생활을 해 온 김모 씨(28·여)는 “일을 하고 싶어도 지난 10년이 공백으로 남으니 받아주는 곳이 없다”며 “이런 두려움 때문에 은둔이 길어지지 않도록 직업훈련 등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