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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불안 초조 우울… 우린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입력 | 2020-08-22 03:00:00

◇이기적 감정/랜돌프 M 네스 지음·안진이 옮김/574쪽·2만2000원·더퀘스트




불안 우울 슬픔 같은 감정은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기에 자연선택 과정에서 살아남았고 고통이 인류의 유전자에는 이로울 때가 많다고 진화정신의학은 분석한다. 감정이 행복을 위해 진화했으리라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뜻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당신이 수렵채집시대에 사는 원시인인데 어제 사자를 가까스로 피했다고 상상해보라. 오늘 당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현명할까? … 위험징후가 하나라도 나타나면 재빨리 집이나 안전한 장소로 달려가야 한다.”

공황장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언급된 책의 구절이다. 오늘날 공황장애 환자는 야생의 사자와 마주친 경험은 없다. 공황발작은 위험 앞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시스템이 잘못 울린 경보라는 것이 저자 랜돌프 M 네스의 비유다. 이 거짓정보들이 몸 상태를 계속 살피고 흥분의 수위를 높이며 시스템을 민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 자연은 인간에게 나쁜 감정을 심었는가.’ 진화의학의 개척자로 알려진 저자의 질문이자 책의 화두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이자 ‘진화와 의학 연구센터’ 소장인 그는,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쓰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진화생물학자 조지 윌리엄스와 1994년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를 출간했다.

‘이기적 감정’이라는 한국어판 제목은 ‘이기적 유전자’의 후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책의 원제는 ‘Good Reasons for Bad Feelings: Insights from the Frontier of Evolutionary’다. 한국어판 표지에 부제로 써 있는 ‘나쁜 감정은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다’가 저자의 답변에 가깝다.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다. 전문적인 분야인 데다 진화생물학의 원리를 활용해 의학, 특히 정신의학에 접근하는 진화정신의학 자체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책은 ‘왜 인간의 마음은 쉽게 무너지는가’ ‘감정의 이기적 기원’ ‘사회적 삶의 기쁨과 슬픔’ ‘고장 난 행동과 심각한 정신질환들’ 4부로 구성돼 있다.

그가 말하는 진화정신의학의 키워드는 불안 우울 슬픔 같은 감정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기 때문에 자연선택 과정에서 살아남았고, 우리가 겪는 고통이 인류의 유전자에는 이로울 때가 많다는 것이다. 감정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진화했으리라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신경성폭식증과 식욕부진증,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조현병, 자폐 등 현대인이 겪는 정신적 문제들을 다룬다. 기존 정신의학이 뇌 질환 위주로 진단하고 있는데 진화생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생생한 임상사례와 묵직한 철학적 질문이 주제의 생소함과 전문용어의 장벽을 어느 정도 무너뜨린다. 특히 진화정신의학이 진화생물학과 정신의학으로 갈라진 협곡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강조한 에필로그가 흥미롭다. 오늘날 싯다르타가 살아 있다면 그의 질문은 이렇게 바뀔 것이다.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욕구라는 것이 왜 생겨났으며, 욕구를 좇으면서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유쾌한 감정은 왜 아직도 남아 있는가?”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