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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여개 슈베르트 성악곡 우리말로 옮긴 77세 전직 교사

입력 | 2020-08-24 03:00:00

김설지씨 768쪽 가곡전집 출간, 고교때 음반으로 슈베르트 첫 만남
중창-합창-교회음악 등 모두 번역… 주인공 직업 자세한 설명도 돋보여
“라틴어 가사 곡들도 번역하고 슈만-브람스-베토벤도 도전해볼 것”




김설지 씨의 한자 이름은 ‘눈 가지’를 뜻하는 ‘雪枝’다. ‘겨울 나그네’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는 ‘흰색보다 싱그러운 초록색을 좋아한다’며 미소지었다. 김설지 씨 제공

“가사의 내용을 알고 들으면 피아노 반주가 들려주는 세세한 표정까지 새롭게 들립니다. 독일 가곡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네요.”

77세의 음악애호가가 800곡 넘는 슈베르트의 성악곡을 번역해 국배판 768쪽 분량의 방대한 책으로 내놓았다. 전직 지리 교사 김설지 씨가 옮기고 엮은 ‘슈베르트 가곡전집’(동서문화사). 가곡뿐 아니라 중창곡, 합창곡, 오페라 아리아, 교회음악 등 가사가 붙은 슈베르트의 음악은 거의 모두 번역해 실었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대학생인 오빠가 게르하르트 휘슈가 노래한 슈베르트 가곡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전집 축음기 음반을 사오셨죠. 언니와 함께 날마다 들으며 슈베르트와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교사가 되고 결혼해 자녀를 키우면서 음악 사랑에 한층 불이 붙었다. 온 가족이 거실에서 당시 첨단 영상매체였던 LD(레이저디스크)를 틀어놓고 오페라를 감상하곤 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를 듣는데, 영어 자막을 읽으려니 자꾸 뜻을 놓치게 되더군요. ‘번역해 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독일어를 소환해 시작한 작업에 자신이 붙었다. 한 편 두 편 번역한 오페라 대본을 인터넷 음악애호가 클럽에 올렸더니 찬사가 빗발쳤다. 내친김에 ‘첫사랑’ 슈베르트의 가곡을 번역하기 시작한 게 엄청난 작업이 됐다.

이 두꺼운 책에 대충대충은 없다. 가곡집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만 예로 들어도 슈베르트가 곡을 붙이지 않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빠짐없이 번역했고, 주인공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인 ‘초급 도제(Geselle)’의 의미 등 상세한 주석을 붙였다. 주인공, 서술자, 시냇물 등 화자(話者)에 따라 적절한 어미를 선택해 물 흐르듯이 읽힌다. ‘겨울 나그네’ 중 ‘얼어붙은 시냇물 위에서’에선 흔히 ‘깨진 반지’로 번역되는 ‘zerbrochner Ring’을 ‘군데군데 끊어 빙 둘러놓은 돌’로 제대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번역했다.

김 씨는 은퇴한 뒤 강원 화천군에서 전원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애호박과 토마토를 돌보면서도 늘 휴대용 라디오로 음악을 듣는다. 그래도 만족은 멀었다.

“새로 입수한 해외 슈베르트 전집을 보니 제가 번역한 ‘알프스의 사냥꾼’ 노래에 두 연(聯)이 빠져 있더군요. 빠진 부분을 집어넣고, 슈베르트가 라틴어 가사로 쓴 곡들도 번역해 증보판을 낼 생각입니다. 그 다음? 슈만 가곡들을 번역 중이고, 브람스, 베토벤…. 눈도 어두워지고 체력도 달리는데, 마음이 급합니다(웃음).”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