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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는 것과 잊혀지는 것[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입력 | 2020-08-26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기억 속에 누군가를 지켜내는 일은 대단합니다. 치매 환자의 증가는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잊음이 아닌 잊힘, 잊힌 사람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이 나를 기억하지 못할 때 애처로움이 우선하지만 내가 잊혔다는 사실도 마음을 후빕니다.

기억되고 싶으세요, 아니면 잊혀도 마음이 평안한가요? 잊히길 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듭니다. 인간은 어울리며 살아야 해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잊히지 않는 존재로 남기를 염원합니다. 내가 잊힌다면 내 존재와 존재의 의미가 심각하게 손상됩니다. 자존감은 끝없이 추락하고, 잊는 사람과 잊히는 사람의 관계는 느슨하게 풀어져서 결국 끊어집니다.

잘 살려면 추락한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잊힌 사람은 잊은 사람의 행위를 정당화할 ‘이유’를 찾거나 만들어내려고 애씁니다. 그럴듯한 이유가 나타나도 잊힌 사실, 그 결과로 생겨난 상처를 깔끔하게 지우기는 어렵습니다. 잊혀진 내가 잊은 사람에게 덜 중요한 사람이고 덜 가까운 사람이라는 마음의 흉터는 남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될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는 긴장을 풀지 않고 남이 나를 잊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잊히는 것은 버려지는 겁니다. 버려짐의 극단적 형태는 죽음입니다. 잊힘은 자연스럽게 죽음과 연결되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폭풍을 일으킵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중요한 에너지로 본능적 욕구를 제시한 프로이트와 달리 영국 분석가 로널드 페어베언은 남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가 더 중요하게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잊힘은 평온했던 마음에 갑자기 닥치는 지진이나 해일과 같습니다.

잊힘에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이 대중에게 잊힌다면 정치생명에 치명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명해질 수 없다면 악명(惡名)이라도 떨치려고 애를 씁니다. 뻔히 사회적 논란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무리하거나 비합리적인 말을 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잊힘을 두려워해서 대중의 머리에 ‘전기충격’을 주려는 전략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자존감이나 자신감이 약할수록 잊히는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합니다. 자존감이 충분한 사람은 어차피 내가 아닌 남이 격려하거나 위로하지 않아도 세상살이에 어려움을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자존감이 부족하면 채워줄 사람을 끝없이 찾아 헤매야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져 가뜩이나 부족한 자존감을 바닥내는 악순환의 길을 갑니다. 죽음을 영원한 잊힘,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추락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잊힘을 거부하는 욕구가 있는 한편, 잊힘에 대한 갈망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와 관계를 단절하기를, 나를 혼자 있게 하기를, 혼자 있을 자유를 내가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같이 돌아갑니다. 같은 사람에게 정반대의 감정을, 예를 들어 동시에 사랑과 미움을 느끼는 일도 흔합니다. 잊히기를 싫어하면서 잊히기를 원하는 겁니다. 무의식에서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이어서 오랫동안 또는 끝끝내 모를 수도 있습니다.

결혼과 출산의 경우에 비춰 보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마음 한구석에는 내 아이를 통해 세월이 지나도 기억되고 싶은 욕구도 있습니다. 결혼을 미루고 있는 자식에게 느끼는,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는 부모의 안타까움은 내 삶이 자식과 그 자식을 통해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감으로 이어집니다. 삶의 안정적인 기반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떠난 이후에도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효(孝)라는 복합 개념을 간단히 정의해도 된다면, 부모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래서 설, 추석, 생신에 자식이 부모를 찾아뵙는 겁니다. 효의 구체적 실천행위인 제사의 핵심은 나의 뿌리인 조상을 잊지 않겠다는, 그리고 조상에게 하는 것처럼 부모에게도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맹세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잊지 않고 잊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신호가 올 때 내 마음에 저장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불러올 수 있다면 잊지 않고 잊히지 않습니다. 급하면 ‘엄마’를 찾습니다. 돌아가셨어도 마음에 저장된 엄마가 도울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잊힘의 극단적 형태는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정체성 그리고 내 삶의 소명을 스스로 잊는다면 남이 나를 잊는 것보다 내 삶에 주는 영향이 더 깊고 더 큽니다. 동시에, 내가 바뀌려면 현재의 나를 잊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나가는 창조적 과정도 필요합니다. ‘나’는 고착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잊기’조차 극단적으로 가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억의 기반 없이 잊기에만 몰두하다가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