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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의 우선순위[횡설수설/송평인]

입력 | 2020-08-27 03:00:00


외교에서 예스(yes)라고 명백히 말하지 않으면 노(no)라고 본다. 외교에서는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 대개 에둘러 말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그제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주(駐)뉴질랜드 대사관에서 벌어진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논란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아직은 사과할 때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뉴질랜드 쪽 피해자는 즉각 “역겹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장관이 함부로 사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련한 외교장관이라면 아예 ‘사과’라는 말이 들어가는 표현을 피했을 것이다.

▷강 장관 발언의 부적절성이 크게 부각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사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에 대한 불만 표시와 겹치면서다. 강 장관은 지난달 29일 아던 총리가 문 대통령과의 정상 통화에서 성추행 의제를 불쑥 꺼내 문 대통령을 불편하게 한 데 대해 대통령과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 발언은 그 자체로 외교적 언사가 아닌 데다 성추행이라는 사안의 본질보다 변죽에 더 신경 쓰는 모습으로 비쳤다.

▷강 장관은 문 대통령이 각별히 아껴 대통령 임기 말까지 함께할 장관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강 장관은 세련된 이미지에 통역사 출신이라 영어 능력도 출중하다. 그러나 외교는 외모나 영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노련한 경험과 뛰어난 지혜로 대통령을 설득하고 이끌 만한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데 강 장관은 여전히 청와대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에 머물고 있다.

▷1972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외교를 관장하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저우 총리는 이미 200년 가까이 지난 프랑스 혁명을 두고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답했다. 부르주아 혁명을 넘어 사회주의에도 영향을 미친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혁명이라 말하는 학자도 있다. 미중(美中) 수교라는 외교적 대전환을 이룬 외교 수장들답게 현대사를 규정하는 그 정도로 크고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었고 그 정도로 깊은 숙고가 담긴 답변을 할 수 있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어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재선 후보로 뽑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직자는 공무 중에 정치활동을 못 하도록 한 해치법을 어겨가며 트럼프 지지 연설을 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이 사임했을 때 백악관에 어른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왔다. 한미 양국의 외교 수장 둘 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지만 그냥 딱 거기까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