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에서 예스(yes)라고 명백히 말하지 않으면 노(no)라고 본다. 외교에서는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 대개 에둘러 말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그제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주(駐)뉴질랜드 대사관에서 벌어진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논란과 관련해 “사실관계를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아직은 사과할 때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뉴질랜드 쪽 피해자는 즉각 “역겹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장관이 함부로 사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련한 외교장관이라면 아예 ‘사과’라는 말이 들어가는 표현을 피했을 것이다.
▷강 장관 발언의 부적절성이 크게 부각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사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에 대한 불만 표시와 겹치면서다. 강 장관은 지난달 29일 아던 총리가 문 대통령과의 정상 통화에서 성추행 의제를 불쑥 꺼내 문 대통령을 불편하게 한 데 대해 대통령과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 발언은 그 자체로 외교적 언사가 아닌 데다 성추행이라는 사안의 본질보다 변죽에 더 신경 쓰는 모습으로 비쳤다.
▷강 장관은 문 대통령이 각별히 아껴 대통령 임기 말까지 함께할 장관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 강 장관은 세련된 이미지에 통역사 출신이라 영어 능력도 출중하다. 그러나 외교는 외모나 영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노련한 경험과 뛰어난 지혜로 대통령을 설득하고 이끌 만한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데 강 장관은 여전히 청와대에 의해 보호받는 이미지에 머물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어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재선 후보로 뽑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직자는 공무 중에 정치활동을 못 하도록 한 해치법을 어겨가며 트럼프 지지 연설을 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이 사임했을 때 백악관에 어른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왔다. 한미 양국의 외교 수장 둘 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지만 그냥 딱 거기까지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