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니까, 어대낙(어차피 대표는 이낙연)이니까, 당연하다고들 한다. 29일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경선이 관심을 못 끄는 것 말이다. 나는 코로나나 어대낙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가 돼도 민주당은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암만 별 볼 일 없는 정당이라고 해도 당 대표가 바뀌면 당도 달라져야 정상이다. 미래통합당을 보시라. 한시적 비상대책위원장이지만 김종인이 대표 자리에 앉자 보수꼴통, 꼰대정당 느낌이 줄지 않았나.
전임 정권 때만 해도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만 외치는 집권당 대표 경선은 없었다. 2014년 새누리당 시절 김무성은 ‘할 말은 하는 집권여당’을 내걸었고, 2016년 친박 이정현은 “나를 대통령의 내시라고 불러도 부인하지 않겠다”면서도 “당을 혁명해서 뒤바꿔 보겠다”고 나서 당 대표가 됐다. 결과적으론 실패했지만 수평적 당청관계여야 한다는 의식은 분명했다.
박주민(왼쪽부터), 김부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가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당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 호남권·충청권 온라인(온택트) 합동연설회에서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 누가 당대표 돼도 지금 같을 문주당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도 2년 전엔 ‘강한 리더십’을 내세웠다. 이해찬만이 청와대를 견제할 수 있다는 기대가 꿈틀거렸을 정도다. 물론 그런 정황은 알려진 바 없다. 총선을 비롯한 모든 걸 ‘청와대 정부’가 주도하는 문주당(文主黨)으로 만든 것이 이해찬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이번 경선주자들의 공약은 이런 문주당 그대로 가자는 거다. 지난주 갤럽 여론조사 당 대표 선호도 1등인 이낙연(48%)의 공약 1번은 ‘민주정부 4기를 준비하는 책임정당’이다. 2위 김부겸(15%) 역시 개헌·공수처·행정수도 이전 등 문 대통령 숙원사업을 성공시키는 책임정당을 3대 당 혁신공약 중 하나로 내세웠다. 차이가 있다면 이낙연은 내년 3월 대선 후보 경선까지만, 김부겸은 임기 2년을 꽉 채우겠다는 정도다.
정책토론·디지털정당 등을 내건 찐문 박주민(8%)의 정당개혁 공약이 달라 보이지만 뜯어보면 더 격한 문주당으로 끌고 가겠다는 거다. 사회적 의제 연석회의, 권리당원 1만 명 이상 온라인 청원 시 안건 상정 및 결과 발표 등의 내용은 의회민주주의 아닌 인민민주주의, ‘문파’ 주도 정당을 예고한다.
● 대통령을 향한 공세 차단이 위기 극복인가
한 달 전 제주도에서 열린 첫 합동연설회에서 이들은 일제히 당의 위기를 말했다. 자신만이 위기의 리더가 될 수 있다면서도 그래서 집권당 대표로서 당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다고 말하지 않는 건 무책임하다. 매사를 엄중하게 주시하는 ‘엄중 낙연’은 22일 합동토론회에서 “당정관계를 실질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내각에 국민의 목소리를 더 정확히 전달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곧 “청와대와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대통령을 만나 국민과 당의 의견을 전하고 동시에 대통령과 내각을 향한 왜곡된 공세는 사실을 근거로 차단하겠다”라고 덧붙였다. 10일 인터뷰 때만 해도 “국무총리는 2인자지만 당 대표는 1인자다. (할 말을 하는) 새로운 이낙연을 보게 될 것”이라더니 2주일도 안 돼 온몸으로 문 대통령을 보호하겠다고 말을 바꾼 꼴이다.
● 그들이 문파를 두려워하는 이유
김종인은 “그동안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봤는데 깜짝 놀랐다”고 이낙연을 평했다. 15일 광복회장 김원웅의 파묘 주장에 이낙연이 “광복회장으로서 그런 정도의 문제의식은 말할 수 있다”고 하자 나온 말이다. 김종인은 “지금 권력이 눈앞에 놓여 있어서 그런지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를 했다”고 해설했다. 덕분에 우리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민주당의 본질에 대해 한층 더 다가갈 수 있게 됐다. 당 대표 선거에서 강성 지지층인 권리당원 투표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40%다. 물론 당 소속 국회의원과 시도위원장 등 대의원 1만5000여 명 투표의 반영 비율이 45%로 크긴 하다(나머지는 국민 10%, 일반당원 5%). 하지만 대의원들의 지지후보는 각기 다른 데 비해 주로 온라인으로 입당해 월 1000원의 당비를 내는 권리당원들은 문 대통령 중심으로 결집력이 대단하다.
● 문 대통령이 문파를 키워 전체주의로 가는 꼴
올해 문파는 1·1·8운동(당 대표는 1번 이낙연, 최고위원은 1번 신동근, 8번 김종민)을 벌였다고 한다. 결과는 뚜껑 열어야 알겠지만 일국의 집권당 대표 될 사람이 한 줌도 안 되는 대통령 충성파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다시 ‘청와대 정부’를 인용하자면, 문파는 대중적 지지 현상 정도가 아니라 정치화, 권력화됐다는 차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정당처럼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민주주의 원리대로 논쟁과 협상을 통해 차이를 조정할 방법도 없다. 이 정도 큰 규모의 정치 현상은 권력의 개입 없이 유지되고 계속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문 대통령이 문파 현상을 키우는 방식으로 청와대 정부를 심화시키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가고 있다는 얘기다.
● 노무현은 靑의 黨 장악을 유신잔재라고 했다
노빠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치며 문파로 변신하는 데 기여한 고 노무현 대통령은 살아생전 당정(黨政)분리를 강조한 정치인이었다. “당정분권론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우리 (정치) 지도체제가 잘못됐다는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대통령이 당을 장악하고 그 당을 통한, 당의 장악력을 통해서 의회 의원들의 투표행위를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제왕적 대통령제다….한국이 유독 이렇게 대통령이 당을 통해서 의회를 지배하는 것은 유신시대의 잔재거든요. 공화당 정권의 잔재거든요. 청산되어야 할 것입니다.”(노무현 2001년 자전구술 ‘통합의 정치를 향한 고단한 도전’).
2017년 5월 9일 방송사 출구조사에서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밤, 문재인은 “다음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우리 더불어민주당 정부”라고 똑똑히 말했다. “정당이 생산하는 중요한 정책을 정부가 받아서 집행하고, 인사에 관해서도 당으로부터 추천받거나 당과 협의해 결정하는,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정부가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던 기억을 문 대통령이 되살려주기 바란다.
● 문파에 언제까지 휘둘릴 텐가
아니면 옆에서 지켜본 이낙연, 김부겸, 박주민이 기억해내야만 한다. 문 대통령이야 1년 9개월 뒤면 청와대에서 나오겠지만 민주당은 앞으로도 시민의 의견을 조직하는 공당 역할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으로서 유신시대 뺨치는 청와대 거수기로 전락한 것만도 땅을 칠 노릇이다. 심지어 차기 대통령을 바라보는 정치인이 실체도 없는 홍위병 온라인 테러집단 앞에 설설 기는 나라가 어떻게 민주주의일 수 있는지 모골이 송연하다. 한때 ‘정당정부’를 말했던 문 대통령이, 적폐청산을 부르짖는 문재인 청와대가, 유신 잔재인 당청 장악도 모자라 문파를 상왕처럼 모시는 상황이 부끄럽지 않은가.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