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왼쪽 원의 둘레에 지름이 0.5cm인 원을 빙 둘러 가면서 그려 넣고, 오른쪽 원의 둘레에는 지름이 2cm인 원을 그려 놓을 경우 두 원의 크기는 어떻게 보일까. 이번에는 왼쪽의 원이 더 크게 보인다. 큰 원에 의해 둘러싸인 원보다 작은 원에 의해 둘러싸인 원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지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올바른 지각이 아니라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주변 환경이 변화됨에 따라 본질적인 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본질과는 동떨어지고 변형된 원이 인간의 시야에 새롭게 현상된다. 철학의 한 분파인 현상학(現象學)은 이러한 점에 착안해 존재의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사회문화적 조건들을 끄집어내 심문한 후 존재가 가진 원래의 제 모습을 찾으려는 학문적 시도다.
개인의 경험에는 편차가 있으며 필연적으로 오류가 따른다. 경험을 기준으로 삼으면 어떠한 보편적 진리도 정초(定礎)할 수 없다.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성 가치와 관습적 생각, 이론들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야 한다. 후설은 이를 판단 중지라고 한다. 그런 후 이런 것들로부터 초연한 순수 주관성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순수한 자아(주체)를 통해 의식과 지각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 현상학의 학문적 목표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 역시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현상(감각적 경험)은 존재의 본질과 다르다고 봤다. 그는 존재의 본질, 진리의 본질을 진재(眞宰)라고 표현했다. 진재는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우매한 인간들이 진재를 추구하는 방법론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는 게 장자의 주장이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장자의 진단은 후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후설은 ‘논리연구’라는 책에서 본질에서 벗어난 존재의 모습을 그림자에 비유하고 있다. 장자는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려면 감각기관을 통한 지각을 중지하고 판명(判明)한 정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자 양생주편에는 “눈으로 보지 말라. 감각기관을 통한 지각을 중단하고 순수한 정신으로 추구하라(不以目視 官知止 以神欲行)”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止(지)’는 후설이 말하는 판단 중지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고, ‘神(신)’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선험적 자아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은 혁신이다. 혁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부터 구분해야 한다. 본질적인 것은 기업이 추구해야 하는 미래의 핵심 가치이고, 비본질적인 것은 혁신을 위해 버려야 하는 과거의 낡은 가치다.
U-프로세싱은 개인에게만 필요한 절차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는 기업에도 필요한 절차다. 기업은 미래 사회에 적합한 경영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조직의 현주소와 좌표를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적 트렌드에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은 깨끗이 잊고 본질적인 미래 가치에 시간과 자산을 집중 투자해야 한다.
※ 이 글은 DBR(동아비즈니스리뷰) 8월 15일자에 실린 ‘관습에 젖은 어제의 나를 잊어라’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