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인 28일 오후 5시,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돌연 사임의사를 밝혀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 언론들도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7년 8개월의 연속 재임기간이라는 일본 현대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을 세운 아베 정권이 이제는 그 막을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가 일본 정치사에 그리고 한일관계에 남긴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 한일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아베의 유산, 그 이루지 못한 꿈
아베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외손자라는 것은 이미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기시는 만주국 정부에서 요직을 거쳤고, 전후에는 현재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 탄생을 주도한 일본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물 정치인입니다.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라는 다소 섬뜩한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 기시 총리는 1960년 초 기존의 <미일안보조약>을 대체하는 <新미일안보조약(Treaty of Mutual Cooperation and Security between the US and Japan)>의 국회 비준을 추진하다가 소위 ‘안보투쟁’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반대시위에 부딪히며 그 해 7월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 국민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후대에 기시는 미일관계를 보다 동등하게 재조정하고 평화헌법을 재검토함으로써 일본 스스로의 국방력을 갖추려고 했던 정치인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기도 합니다. 아베에게 외할아버지인 기시의 정치철학과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는 그 자신이 보수 우파의 선봉에 서는 데 정신적인 동력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베의 최종 목표는 평화헌법 개정이었고 그는 이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현재 일본 국가는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불완전한 것이며 헌법 개정은 이를 완전한 형태로 ‘복원(restore)’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국내 언론에서는 일본을 ‘전쟁 가능한 나라’로 만들려는 혹은 ‘재무장’시키려는 ‘야욕’ 등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모든 ‘국가’의 본질이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일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일본 보수 우파들이 대체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식이며, 그래서 이들 중 다수는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자민당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기에 2018년 3월에서야 주요 4개 항목에 대해 당내 입장을 정리한 것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또 아베 총리 스스로가 사임의사를 밝힌 기자회견에서도 언급했듯이 헌법 개정에 대해서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지는 못했기에, 8년 가까운 재임 기간과 현재 참의원·중의원 양원 모두에서 공명당과 연합하여 다수의석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헌법 개정은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아베가 물려받은 유산은 이제 아베 스스로의 유산이 되어 후임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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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가 한일관계에 남긴 것
우리에게는 역대 일본 총리 중에 가장 비호감도가 높은 총리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은 아베가 한일관계에 남긴 것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매우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하고자 합니다. 첫째, ‘코리아 패싱’입니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현재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관계 회복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있기까지 여러 가지 요인이 작동하였지만, 현재 일본의 외교 정책이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을 지향하며 미국-인도-호주와 ‘4자 동맹(Quad Alliance)’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더 큰 틀에서 보면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는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중국을 위시로 하는 대륙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일본의 독자적인 국방과 외교 전략의 축을 공고히 하려는 일본 보수 우파의 전략이 담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현재 일본 정부는 한국을 우호와 협력의 파트너로 바라보기 보다는 리스크 관리 차원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이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조치로, 그것이 국내에서 ‘노재팬’ 운동을 불러일으키며 다시 지소미아 논쟁으로 확산되었던 과정에서 보았듯이, 현재 한일관계는 경제의 문제가 안보 문제로, 안보 문제가 다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의 고리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선을 먼저 넘은 것은 일본입니다. 일본은 수출규제 강화의 명분으로 ‘안보’가 우려된다는 것을 꼽았습니다. 한국을 상대로 ‘안보’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규제 조치를 행한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은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인데, 현재 일본 정부는 이것을 표면화시켰습니다. 그 이면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현재 일본이 자국의 대전략을 재구성하는 시점에서 한국을 파트너 보다는 리스크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바입니다.
이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은 한국
그럼 현재 아베 정권의 이러한 정책이 후임 총리가 들어서면 바뀔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냥 그렇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와 시스템이 매우 다르지만, 엄연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선출직 정치인들은 선거권을 가진 국민의 요구를 반드시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양원의 다수당 위치에 있는 자민당의 현재 정치적인 입지는 선거를 통해 창출된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 일본의 외교 노선과 한국에 대한 정책이 일본의 국민적인 정서와 전혀 동떨어진 아베 한 사람의 창조물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니 아베 이후에 어떤 정치인이 총리가 되더라도 지금까지의 기조가 극적으로 바뀌는 것은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도자가 바뀌는 이 시점이, 더군다나 미국의 대선까지 겹쳐서 현상(status quo) 변경의 틈이 생기려는 지금이 바로 우리에겐 기회입니다. 일본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한일관계 개선은 필요 없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의 노재팬 운동이 성공하여 ‘극일(克日)’과 ‘탈(脫) 일본’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 된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만, 한일관계는 양국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본질이 있습니다. 일본은 북한과의 문제에서나 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행위자 중 하나입니다. 작년 하노이 회담의 결렬에는 일본 정부의 입김이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분석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외교정책에 다면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 뒷전으로 물려놓는 것은 결코 우리 국익에 부합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차기 총리가 정해지는 바로 이 시점에 우리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적인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 다자적 국제관계 안에서 주도권을 취하기를 주문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