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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금융[횡설수설/서영아]

입력 | 2020-09-01 03:00:00


노인에겐 서러운 일이 많다. “난 가만히 있는데 세상이 자꾸 바뀐다”는 탄식도 그중 하나다. 어느 날 갑자기 열차표 예매 방법이 인터넷 중심으로 바뀌고 햄버거 가게나 푸드코트에서 음식을 주문하기도 어려워졌다. 2G폰이면 충분했는데 어느 틈에 대세는 스마트폰. 덩달아 바꾸고 보니 소소한 사용법 하나하나가 거대한 장벽이 된다. 코로나 위기 재난지원금도 은행에 줄서서 신청하는 사람 대부분이 고령자들이었다.

▷노인들이 느끼는 디지털 소외는 정보기술 세계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데서 온다. 기계도 프로그램도 익숙해질 만하면 체제부터 사용법까지 휙휙 바뀐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뒤처지는 사람들까지 배려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학교수도, 회사 간부도 은퇴가 두려운 이유 중 하나로 컴퓨터 관련 잡무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진다는 점을 들 정도다.

▷좀 더 심각한 노인 소외도 있다. 가령 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노인, 특히 치매환자 소유로 은행에 잠겨버린 돈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금융자산이 2030년이면 215조 엔(약 24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가뜩이나 소비가 위축되고 돈이 순환되지 않아 고민인 일본의 또 하나 골칫거리다. 치매 환자는 2030년이면 830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돼 이 무렵 전체 금융자산의 50%가 75세 이상의 소유일 것이라 한다. 일본 사회가 미리미리 이들의 돈을 신탁 관리할 ‘성년 후견인 제도’ 등 보완책 마련에 바쁜 이유다.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를 맞는 우리나라도 어르신들을 위한 맞춤형 금융서비스를 마련한다고 한다. 금융위원회가 그제 발표한 ‘고령친화 금융환경 조성방안’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 예컨대 노인이 고액을 결제하면 보호자 휴대전화에 결제내용이 자동 통보되는 신용카드, 기능을 단순화한 고령자 전용 스마트폰 앱이 나온다. ‘노인금융피해방지법’(가칭)을 만들어 노인 대상 금융사기는 물론 보호자나 지인이 노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막고, 치매 노인의 후견인 역할을 지원하는 일명 ‘치매 신탁’도 활성화한다.

▷이 소식에 달린 댓글 반응이 각양각색이라 놀랐다. “내 돈 내가 쓴다는데 웬 참견이냐”거나 “감시 사회를 만드느냐”며 발끈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치매어르신의 씀씀이 탓에 고생해본 경험을 들어 환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상대적 약자인 노인들이 살기 편한 사회는 모든 세대가 살기 편한 사회일 수 있다. 다만 부쩍 늘어나는 세금에 데어서일까. 정부가 노인들의 주머니사정도 통제하고 싶은 건가 하는 의구심이 슬쩍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동네 곳곳에 CCTV를 설치하면 안전은 얻지만 자유를 잃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