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포도를 딸 때 폭우가 쏟아져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착즙할 때는 착즙기가 펑크가 나서 혼비백산을 했다. 착즙이 하루 늦어졌지만 어찌어찌해서 발효탱크에 무사히 들어가서 한시름 놓는다 했더니 이번에는 냉각기에 문제가 생겼다. 이런 날씨에 냉각기가 멈추면 올해 와인은 망쳤다고 봐야 한다. 날이 더우면 과일즙은 빠르게 발효를 시작해서 끝내 버린다. 그러면 맛이 없다. 포도에 자연적으로 붙어 있는 효모들은 어둡고 차가운 과일즙 속에서 천천히 움직여야 좋다. 느리게 방귀를 뀌고 싸락싸락 찌꺼기를 뱉어내야 술맛도 깊어진다. 기술자는 매일 변화되는 알코올을 체크하고, 이 모든 것은 긴장되면서도 평화롭게 진행돼야 한다.
그런데 이 찜통더위에 냉각기가 돌아가지 않는다니, 레돔은 탱크 온도를 낮추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 “얘들아 조금만 참아줘 봐!” 그러나 효모의 사전에는 ‘참을 인’자 따위는 없다. 레돔은 발효탱크를 뱅뱅 돌다가 머리를 쭈뼛 세우며 소리친다. 발효탱크에 전기가 통한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폭우에 온 양조장이 축축하더니 어딘가에 누전이 되었나 보다.
이제는 냉각기 차례가 되었다. 문제는 냉각기가 독일에서 왔다는 것이다. 고장이 나도 고쳐줄 사람이 없다. 프랑스에서 살지 왜 여기 와서 나를 이렇게 고생을 시키는지 모르겠다고, 지금이라도 다 엎고 가면 좋겠다고 했더니 레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다시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냉각기 기술자를 수소문해 본다. 어디에나 고수는 숨어 있나 보다. 잘생긴 청년이 와서 기계를 이렇게 해부하고 저렇게 붙이고 두드린다. “컴프레서의 압력이 스타트 전에는 7인데 지금은 14가 되었네요. 원래 암페어가 17인데 본류에서는 50암페어로….” 반나절 동안 2L의 얼음물을 마시며 기술자는 쉬지 않고 설명하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모르겠다. “제발 고쳐만 주세요!”
이윽고 고쳤다. 미지근하던 발효탱크에 차가운 냉각수가 흐르기 시작했다. 끓어오르던 즙도 천천히 진정이 되니 레돔의 얼굴도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요 며칠 사이 5kg은 빠진 것 같다. 너무 수척해 보인다. 무엇인가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다. 시어머님이 아들을 위해 만들었던 그런 음식,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마침 밭에서 딴 호박이 있고 그 옆에 파와 감자가 있어 모두 찜솥에 넣고 푹 끓여 수프를 만들었다. 딱딱한 빵도 구워 수프 속에 넣는다. 레돔은 수프 속에서 부드럽게 허물어진 빵을 좋아한다. 수프 그릇에 신선한 버터를 한 조각 얹어주니 레돔은 조용히 숟가락을 든다. 하늘에 계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호박 수프를 보고 끄덕끄덕 미소를 지을지, 한숨을 쉬실지 모르겠다. 아마도 미소를 지으실 것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