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북한 간부들과 주민들을 향해 ‘통일에 동참해 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TV로 봤습니다. 그걸 보고 용기를 얻어 탈북을 결심했죠. 그런데 막상 목숨 걸고 와 보니 박 대통령이 탄핵돼 황당하더군요. 대통령도 쫓아내는 나라라니, 무서운 생각도 들었고, 오라는 사람이 없어지니 잘못 왔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죠.”
북한에서 보위부 상위(한국의 중위와 대위 사이 계급)로 있다가 2016년 9월 바다를 헤엄쳐 20시간 가까운 사투 끝에 남쪽에 온 이철은 씨(33)의 얘기다.
# 결심
이 씨가 근무한 청단군은 강화도에서 건너 보이는 황해도 연안군과 붙어 있는 지역이다. 그는 당시 ‘불순녹화물’ 단속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109상무’라는 조직에 소속돼 한국 영상 시청자들을 적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씨는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TV를 열심히 봤다. 그는 황해도 연안군에서 부친과 삼촌 세 명이 모두 보위부 간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위부 간부 집에는 단속이 오지 않았다. 밤에 한국TV를 시청하다 밖으로 나오면 한강 하구 건너에서 한국 불빛이 유혹하듯 반짝거렸다. 한국의 생활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한국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을 잡아내는 일이 괴로웠다.
이 씨는 그럼에도 출근해선 아무 일도 없던 듯 한국 영상 단속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물급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 청단군 군당위원장의 딸이 한국 드라마를 보다 걸린 것이다. 군당위원장은 청단에서 제일 높은 간부다.
군 보위부에는 당위원장의 비리를 감싸줄 측근들이 많았다. 이 씨는 군당위원장 딸의 적발 사실을 상급 기관에 직보했다.
“야, 임마, 너 죽고 싶어. 절차 없이 그런 보고를 왜 단독으로 하는 거야.”
“부장 동지가 묻을 게 아닙니까. 힘없는 백성의 자식은 한국 드라마 봤다고 감옥에 가고, 당 간부 자식은 한국 드라마 마음대로 봐도 되는 겁니까.”
“너, 이 자식. 책대로 하겠단 말이지. 두고 보자.”
부하가 대들자 정치부장은 펄펄 뛰었다. 북한 공화국 창건일인 9월 9일 청단군 보위부 건물에선 이렇게 둘의 말싸움이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즉시 그는 109상무에서 제외됐다. 정치부장에게 찍힌 이상 앞으로도 시련이 계속될 상황이었다.
이 씨는 학교 동창 민철(가명)을 찾아갔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민철은 그즈음 장사를 하다 망해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민철아. 나 한국에 가려 한다.”
“나도 같이 가자.”
둘은 의기투합하기로 했다. 그런데 보위부 증명서가 있는 이 씨와는 달리 민철까지 데리고 국경으로 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한강을 헤엄쳐 가기로 결정했다. 며칠 동안 준비를 하고, 탈북 루트로 정한 연안군 해안 정찰까지 마친 뒤 마침내 둘은 배낭을 메고 탈북 길에 올랐다.
# 사투
둘은 8시 직전 잠복초소를 통과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약 200m쯤 헤엄쳤을까. 뒷쪽에서 잠복을 나오는 군인들이 비춰대는 손전등 불빛이 비쳤다.
헤엄치는 속도보다 물이 빠져 나가는 속도는 더 빨랐다. 30분 정도 지나니 둘은 물이 빠진 갯벌에 엎드린 상태가 됐다. 조용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갯벌을 보복으로 전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동하다 날이 밝아 발각되면 총에 맞을 판이었다.
그날은 보름달이 훤히 밝았다.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구름이 달을 가렸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갯벌을 달리니 그제야 바닷물이 다시 보였다. 이 물은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배낭에서 미리 준비했던 자동차 튜브와 펌프를 꺼냈다. 그런데 갯벌에서 펌프질이 잘 되질 않았다. 겨우 바람을 좀 넣었지만 배낭을 얹으니 사람이 매달릴 정도까지 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둘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맞은편 해병대 건물 불빛이 목표였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점점 지쳐갔다. 몇 시간 뒤엔 튜브에 매달리기 위해 식량이 든 배낭도, 신발도 버려야만 했다.
8시간 넘게 사투를 벌인 끝에 새벽 4시가 가까워왔을 때 민철이 말했다.
“나 이젠 더 힘이 없어. 날 버려두고 너 혼자 가.”
이 씨는 친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민철을 끌고 계속 헤엄쳤다. 그러나 불빛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앞쪽에서 전조등을 비추는 배 한척이 나타났다. 한국 경비정인지 북한 단속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북한 쪽에 걸리면 끝장나는 상황이었다.
전조등이 나타나자 민철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금까지 모든 걸 포기한 듯 했던 그가 약 100m 거리에 보이는 무인도로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작은 이 무인도는 원래 목적지가 아니었지만 배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무인도에 겨우 도착하니 새벽 4시가 지났다. 둘은 전조등을 피해 무인도에서 숨을 곳을 찾아 정신없이 헤맸다. 맨발과 맨손으로 따개비 껍질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바위 위로 뛰어다니다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마침내 둘은 무인도 기슭에 쌓인 쓰레기 더미에 몸을 숨겼다. 몸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 구조
몸을 숨기고 나니 지독한 추위가 몰려왔다. 둘은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꼭 안았다. 그러다 잠시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날이 밝았다. 이 씨는 조심스럽게 무인도 꼭대기로 이동했다. 이곳이 북한 땅인지 한국 땅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인도 꼭대기엔 불을 피운 흔적과 사람 발자국 흔적이 남아있었다.
500~600m 앞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해병대 막사가 보였다. 뒤를 보니 2km쯤 거리에 북한군 초소가 보였다.
멀리 200~300t급 회색 경비정이 눈에 들어왔다. 태극기가 붙어있길 간절히 바랬지만,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북한 보위부도 중국에서 경비정을 수입해 운영하는데, 똑같은 회색이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 갑자기 경비정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씨는 무인도 남쪽 기슭을 헤매며 쓸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지게차로 물건을 나를 때 쓰는 깔판인 나무 파레트가 보였다. 거기에 페트병, 스티로폼 등 뜰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찾아 밧줄로 묶었다. 힘이 빠진 민철을 위해 뗏목을 만든 것이다. 민철이 어디서 포장이 뜯기지 않은 한국산 햇반을 주어왔다. 허기진 둘은 그걸 함께 손으로 퍼먹었다. 남쪽의 밥은 꿀맛이었다.
뗏목을 완성한 건 오후 2시. 이제는 한국 쪽으로 밀려가는 물길에 몸을 맡기고 한국 쪽에 발견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둘은 파레트 위에 올라 앉아 둥둥 떠갔다. 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파레트는 물속에 서서히 잠겨갔다. 멀리서 보면 대낮에 해상분계선 한가운데서 남자 두 명이 앉은 채로 둥둥 떠내려가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남과 북이 그 모습을 다 지켜봤겠지만, 다행히 어느 쪽에서도 총알은 날아오지 않았다.
한두 시간 지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경비정이 두 번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인도와 해병대 막사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고래 떼가 나타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뒤집히면 큰일이다 싶어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쾌속정 한 척이 다가왔다.
한국군이었다. 총을 겨눈 군인들이 소리쳤다.
“귀순입니까.”
“예. 귀순입니다.”
“손드세요.”
배에 탈 때까지 총을 겨눈 군인들이 “손들어”라고 외쳤다.
둘을 배 뒤편으로 끌고 간 뒤 목과 두 손목을 연결해 뒤로 포박했다. 눈도 가렸다. 군인들은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었다. 몸수색을 하니 사복 안주머니에서 비닐에 꽁꽁 싼 보위부 상위 신분증과 만약의 경우 자결하려 준비한 손칼이 나왔다.
쾌속정은 그들을 함정으로 데리고 갔다.
보위부 신분증을 보더니 누군가 나타나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니 나중에 말합시다.”
“배고픕니까?”
“예.”
포박하고 눈을 가린 채로 군함 식당으로 갔다. 잠시 후 라면이 나왔다. 추위로 벌벌 떠는 두 사람에게 군인들이 모포를 씌워주었다.
라면을 먹고 따뜻한 온기가 도니 둘은 식탁에 머리를 박은 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둘을 깨워 눈을 뜨니 군함은 인천항에 도착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둘이 새벽에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명이 어둠 속에서 해양 분계선 남쪽으로 넘어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 갔다를 몇 시간째 반복하며 허우적대는 것을 열상감시장비(TOD)로 지켜본 것이다.
경비정을 출동시켰더니 두 사람은 무인도로 급히 헤엄쳐 갔다. 자기 딴엔 숨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쪽에선 감시 장비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명의 신분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인도에 갑자기 상륙해 접근하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지켜만 보다가 “우리가 무서워 못나온다”고 결론내고 잠시 철수했다. 둘이 다시 나타나 확실하게 한국 해역에 진입했을 때 한국군은 쾌속정을 출동시켰다.
# 동경
이 씨는 태어날 때부터 보위원이 될 운명이었다. 부친과 삼촌 3명이 모두 보위원이라는 건 그의 집안이 뼈 속까지 ‘새빨간’ 집안이란 뜻이다. 북한에는 “보위원 자녀들은 대를 이어 나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김정은의 ‘말씀’이 존재한다.
이 씨 역시 2004년 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도 원산항 보위부 소속 병사로 갔다. 이곳에서 6년 군 복무를 한 뒤 노동당원이 돼 2010년 해주 김종태 제1사범대학에 입학했다. 2014년 대학을 졸업하고 동창들은 교원이 됐지만 이 씨는 보위부 군관으로 발탁돼 약 2년 반 일했다.
당국에서 보위부 군복을 입혀주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한국TV를 보고 자란 이 씨의 마음속엔 남쪽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사무실에 가면 남쪽에서 풍선으로 보낸 각종 라디오가 산더미처럼 수거돼 쌓여있었다. 그는 몰래 좋은 라디오를 빼돌려 윤도현, 나훈아, 임재범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가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건 2006년이었다. 당시 원산항에 적십자사에서 보낸 쌀 약 2만 t을 실은 한국 선박이 들어왔다. 4박 5일 동안 북한 노동자들이 선창에 들어가 작업하는 동안 이 씨는 권총을 차고 이들을 감시하며 배 위에 서있었다. 이 과정에 한국 선원들에게 담배도 얻어 피우고, 대화도 나눴다.
이 씨와 처음 이야기한 남성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선장이었다. 구멍 난 청바지를 입고 있어 “남조선에선 돈이 없어 꿰진 바지를 입냐”고 물었더니 부선장은 웃었다.
“유니폼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땐 뭔 소리인지 몰랐어요. 한국에 와서 알았죠. 지금 제가 유니폼을 입고 다녀요.”
부선장이 북에 대해 물으면 이 씨는 대답 대신 먼 산을 쳐다봤다. 이 씨는 2006년 원산항에 쌀을 싣고 들어온 선박에서 근무한, 권총을 찬 북한 병사와 대화를 했던 그 부선장을 한번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2008년경 원산항에 다른 식량지원 한국 선박이 왔을 때는 이 씨가 먼저 다가가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 씨가 해주에서 대학을 다닐 땐 ‘러닝맨’이란 프로그램에 푹 빠졌다. 보위원이 돼서도 빠뜨리지 않고 봤다고 했다.
“저는 다른 연예인에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김종국은 남자다워서 너무 멋있었죠. 김종국 보려고 러닝맨을 꼬박꼬박 챙겨봤을 정도죠. 한국에 와서도 김종국 외에 다른 연예인은 관심이 없어요.”
# 감시
이 씨는 보위부에서 주민동태 감시 및 외부 ‘불순영상’ 시청 감시를 맡았다. 보위원 한 명이 700~1200명의 주민을 담당했다. 보위원은 20~40명의 서약을 한 민간인 정보원을 둘 수 있다. 대략 주민 30명 중 한 명이 보위부 정보원인 셈이다. 정보원은 수시로 수상한 동향을 보고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매년 보고서를 내야 했다. 이에 대한 대가는 없었다. 나라에서 하라면 해야 하는 것뿐이었다.
보위원은 정보원과 함께 협조원도 둘 수 있다. 지장을 찍고 보위부 문서고에 서류가 보관되는 정보원과 달리 협조원 숫자는 보위원 능력대로 둘 수 있다. 노동당 기관을 제외한 모든 곳에 정보원이 있었다. 경찰격인 보안서에도 보위부 정보원이 있다.
이 씨는 22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황해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몰래 한국TV를 본다. 대다수 가정이 국가에서 검열한 TV 외에 12인치 정도의 작은 중국산 TV를 몰래 갖추고 있고 배터리, 또는 태양열 패널로 전원을 해결한다. TV에는 USB를 꽂는 포트도 있었다. 리모컨으로 채널 자동검색을 하면 한국TV가 나온다고 했다. 정전이 되면 TV를 시청하는 가정을 포착하는 보위부 감청차량이 있긴 하지만, 수량이 많지 않다. 그리고 휘발유가 없어 저녁 8~12시경 중요 지역만 순찰한다.
“우린 사람을 잡아도 악착하게 하지 않았어요. 북쪽에선 탈북민들이 보위부에서 엄청 맞았다고 하는데, 우린 사람을 거의 때리지 않아요.”
청단과 연안은 강화도 맞은편이라 한국 삐라가 많이 날아온다. 신고를 받고 출동해 수거하는 것도 이 씨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남쪽에서 날아온 것 중 USB만 몰래 숨겨요. 비싸니까. 나머진 쓰레기라 보면 돼요. 황해도 사람들이 한국TV를 직접 보는데 삐라 정도로 주민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이 씨는 바닷가를 돌며 한국에서 떠내려 온 물건들을 수집하는 일도 했다. 이를 맡은 부서를 ‘84상무’라고 한다.
북에 보낸다며 페트병에 쌀을 담아 한강 하구에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걸 주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오지도 않아요. 그리고 바닷가 갯벌에 주민들이 접근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주워요. 북한 사정 모르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 희망
한국사회에 나온 이 씨는 처음엔 탈북민 출신 경찰 1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남쪽에서 나서 자라 교육받은 20대 젊은이들도 취직이 안돼 고생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해 4월 플라스틱 샴푸병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올해 1월엔 집을 양주로 옮기고 서울에서 석유공동구매 사업을 하는 협동조합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
“아직 비행기 못 타봤어요. 대다수 탈북민은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첫 비행기를 탄다고 하던데 헤엄쳐 오다보니 비행기를 못 타봤네요.”
그는 외국은 물론 정말 가보고 싶은 제주도도 아직 못 가봤을 정도로 3년 반 동안 열심히 일했다.
탈북 과정에 겪은 20시간의 사투는 트라우마(심적인 상처)도 남겼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도에서 알아주는 배구선수였고, 원산항 보위부에 있을 때는 2㎞ 바다 수영 ‘군사경기’에서 두 번이나 1등을 했었다.
“이젠 물에 허벅지 이상 들어가지 못해요. 발이 안 닿으면 심장이 멎을 것 같아요.”
이 씨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물었더니 “일을 배워 사업도 하고 싶고 대학원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올해부터 ‘북한저격TV’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북한 실상도 전하고 있는데 벌써 구독자가 1만 명이 넘었다.
“남쪽에 왔으니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나요?”
그가 갑자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저의 소원은요. 김종국을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