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덕꾸덕하고 짭조름한 맛, 언젠가 보리굴비의 절묘한 맛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여행이나 모임, 심지어 일도 금지해야 해야 한다는 힘겨운 시간들. 최대한 단순하게 삶을 꾸리는 일과 우울감, 갑자기 치솟는 화, 결핍감 등을 잘 다스리는 일은 쉽지 않다.
녹차를 우리고 얼음 동동 띄워서 보리굴비 살을 올려 먹는다. 눅눅하던 생선살이 퍼지는데 순간 가슴 떨리는 해방감이 왔다. 조그마한 살점 안에 온갖 슬픔과 기쁨이 담긴 고요한 맛이 느껴졌다. 밥상에서 다른 밑반찬을 내려놓고 이 희미한 맛을 즐기는 순간 비로소 평온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서울 강남구 해남집은 남도 음식을 하는 곳이다. 남도 음식 하면 값이 비쌀까 하여 문 열기를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백반을 7000원에 넉넉하게 내어주는 동네 밥집으로 유명해졌다. 홍합을 넣고 푹 끓인 미역국, 슴슴하면서 자극적이지 않은 멸치조림과 연근조림, 잘 곰삭은 장아찌와 묵은지가 상을 묵직하게 채운다. 합리적인 가격에 좀 갖추어 먹고자 한다면 해남정식을 주문하면 된다. 간장게장, 조기구이와 함께 제육볶음까지 두루두루 맛볼 수 있다. 이곳 사장님은 여름에는 예약제로 전남 신안산 민어 한상을 마련하고, 해산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육전과 해남떡갈비도 맛나게 요리해 준다.
단골들이 좋아하는 메뉴는 영광보리굴비이다. 코로 훅 들어오는 쿰쿰함에 살점의 감칠맛이 그만이다. 얼음이 동동 뜬 연초록의 녹차 물은 쌉싸름하고 청량하다. 흑미를 넣고 고슬고슬 지어낸 밥을 녹차 물에 넣고 밥알이 통통해질 정도로 물을 적신다. 손을 바꾸어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찻물에 젖은 밥을 듬뿍 떠올린다. 이제 오른손을 쓸 차례, 노릇한 굴비 살점을 들어 고추장을 폭 찍고 한술 밥 위로 올린다. 찻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입을 재빨리 가져간 뒤 혀를 굴리며 솜사탕처럼 녹여 먹는다. 화사한 맛이 입안에 퍼지는데 난생 처음 아카시아 껌을 씹었을 때의 짜릿함과 비슷했다.
후룩, 한술을 말아먹고 숟가락 내려놓기 무섭게 후룩후룩 연달아 말아먹게 되니 밥도둑이 따로 없다. 할머님이 식욕 없으실 때 찬물에 밥 말아 굴비 올려 드시던 생각도 나고, 어머님이 다른 식구들 밥 다 차리시고 혼자 옆에서 물 말아 드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왜 짠한 모습들은 잊혀지지 않고 나이가 들수록 선명해지는지, 보리굴비를 먹다 보니 가슴 한 구석이 촉촉해졌다.
식당 사장님은 밑반찬이 떨어졌는지 살피며 하나하나 챙겨주고 두 마리가 나온 보리굴비는 밥 한 공기에 다 먹지 못해 작은 반찬통에 싸 들고 돌아왔다. 다시 비가 오는 날 냉장고에서 남은 굴비를 꺼내 들고 찻물을 우렸다. 식당에서만큼 맛은 없었지만 갈증이 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식욕이 없을 때, 혼자라서 적적할 때 지겨움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반찬으로 보리굴비가 참 좋다.
임선영 음식작가·‘셰프의 맛집’ 저자 nalge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