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9년차 분야별 위임통치 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말 제8호 태풍 ‘바비‘로 피해를 입은 황해남도 지역을 방문해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있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권오혁 정치부 기자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린 지난달 20일 국민의힘 간사인 하태경 의원은 브리핑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국회 비공개 보고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동생 김여정에게 권력을 위임해 통치하고 있다고 직접 언급했다는 것이다.
‘위임통치’ 보고의 파장은 상당했다. 위임통치가 최고 권력자의 정상적인 통치가 어려울 때 통치권을 넘겨준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 논란이 커지자 약 한 시간 뒤 추가 브리핑을 통해 하 의원은 “국정 전반의 전권을 위임했다는 게 아니라 사안별로 김여정 등에게 위임했다는 의미”라고 추가 설명에 나섰다. 국정원 관계자도 직접 “김정은의 권한이 분산됐다는 의미이지 김여정에게 (전권이) 위임됐다는 건 아니다”라고 거듭 해명했다. ‘위임통치’ 보고를 계기로 잠잠해졌던 ‘김정은 건강 이상설’, ‘김여정 후계자설’ 등이 다시 고개를 들자 서둘러 차단에 나선 것이다.
○ 달라진 김정은 통치 스타일… 만기친람 대신 역할 분담
2018년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김 위원장의 만기친람식 통치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 위원장은 2018년 4월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 특별사절단을 직접 만나 4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 6개 합의사항에 대해 논의했다. 큰 틀의 방향만 제시하고 참모진에게 실무 협의를 맡기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주요 현안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협상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여권 관계자는 “판문점 선언 내용은 물론이고 의전 관련 결정까지 모두 사실상 김 위원장의 결단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도 중요 결정이 모두 김 위원장을 거쳐야 하다 보니 실무급 협상은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웠다.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는 북한과의 실무급 협상에서 북측 협상팀이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좌절감을 토로했을 정도다.
이 같은 김 위원장의 통치 스타일에 변화가 감지된 것은 국정원이 사실상의 2인자로 지목한 여동생 김여정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다. 6월 4일 첫 담화로 대남 총책 역할을 공식화한 김여정은 김 위원장이 침묵하는 가운데 연쇄 담화를 내고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예고부터 미국에 ‘독립기념일 DVD 요청’까지 남북, 북-미 메시지 발신을 주도했다. 최고지도자를 제외하면 통상 자신의 직책에 한정된 메시지를 제한적으로 내놨던 기존 북한 고위직들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인 것.
김여정의 공식 직책은 ‘당 제1부부장’이지만 노동당 서열 1위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를 담당하고 있어 실권은 훨씬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여정이 실질적으로 조직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가’라는 질의에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직지도부장 자리가 공석인 상황에서 김여정이 실질적 수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위상 높아진 ‘경제·군사 투톱’… 핵·경제 병진노선 강화
실제로 최근 김 위원장이 정상국가화를 시도하면서 일일이 현장지도에 나서기보다 당 회의를 통해 간부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모습도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공개 활동 36회 중 당 회의는 13회로 약 36%를 차지하고 지난달에만 4차례의 회의가 열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김 위원장이 절대 권력과 핵심 사안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보유하면서도 핵심 간부들에게 담당 분야의 정책 결정에 대해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동시에 결정의 결과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을 묻는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 여전한 1인자 김정은… 최대 변수는 건강 문제
다만 다수의 북한 전문가들은 ‘위임통치’를 북한 권력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김 위원장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집권 초기 고모부 장성택 숙청 등 권력 집중에 힘을 쏟았던 김 위원장이 탄탄해진 권력을 바탕으로 집권 2기를 맞아 과거와는 다른 ‘김정은식 지도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홍수·태풍 피해가 잇따르는 위기 상황이 되면서 김 위원장은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6일과 7일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홍수 피해를 입은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를 찾았고, 지난달 27일에는 태풍 바비가 강타한 황해남도 피해 현장을 방문했다. 5일에는 태풍 마이삭의 피해를 입은 함경남도 지역에서 정무국 확대회의까지 개최해 피해 복구를 지시했다. 황해북도 방문 때는 직접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을 몰고 흙길을 달리는 영상을 공개하며 민생을 돌보는 국가 지도자 이미지를 강조했다. 5일 함경남도에선 피해 책임을 물어 도 당위원장(한국의 도지사 격)을 해임하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과거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이 대약진운동으로 고전할 때 류샤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며 “이 같은 방식은 정책이 실패했을 때 희생양으로 삼기 쉬운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건강 문제는 여전히 북한 통치 시스템의 최대 변수로 꼽힌다. 김 위원장이 직접 현장 시찰 등 공개 행보를 재개하면서 올해 4월 불거진 건강 이상설이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이미 지병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장기 집권에 따른 정신적 피로가 상당히 누적됐을 것이란 관측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국정원이 제기한 ‘통치 스트레스’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한 고위 간부 출신 탈북자는 “김정은이 젊은 나이에 비해 고도비만 등 건강 적신호가 지속적으로 포착되고 있다”며 “통치가 장기화되면서 만기친람식 통치 방식을 지속하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권오혁 정치부 기자 hy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