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집의 영광보리굴비. 임선영 씨 제공

임선영 음식작가·‘셰프의 맛집’ 저자
녹차를 우리고 얼음 동동 띄워서 보리굴비 살을 올려 먹는다. 눅눅하던 생선살이 퍼지는데 순간 가슴 떨리는 해방감이 왔다. 조그마한 살점 안에 온갖 슬픔과 기쁨이 담긴 고요한 맛이 느껴졌다. 밥상에서 다른 밑반찬을 내려놓고 이 희미한 맛을 즐기는 순간 비로소 평온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서울 강남구 해남집은 남도 음식을 하는 곳이다. 남도 음식 하면 값이 비쌀까 하여 문 열기를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백반을 7000원에 넉넉하게 내어주는 동네 밥집으로 유명해졌다. 홍합을 넣고 푹 끓인 미역국, 심심하면서 자극적이지 않은 멸치조림과 연근조림, 잘 곰삭은 장아찌와 묵은지가 상을 묵직하게 채운다. 합리적인 가격에 좀 갖추어 먹고자 한다면 해남정식을 주문하면 된다. 간장게장, 조기구이와 함께 제육볶음까지 두루두루 맛볼 수 있다. 이곳 사장님은 여름에는 예약제로 전남 신안산 민어 한 상을 마련하고, 해산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육전과 해남떡갈비도 맛나게 요리해 준다.
후룩, 한술을 말아 먹고 숟가락 내려놓기 무섭게 후룩후룩 연달아 말아 먹게 되니 밥도둑이 따로 없다. 할머님이 식욕 없으실 때 찬물에 밥 말아 굴비 올려 드시던 생각도 나고, 어머님이 다른 식구들 밥 다 차리시고 혼자 옆에서 물 말아 드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왜 짠한 모습들은 잊혀지지 않고 나이가 들수록 선명해지는지, 보리굴비를 먹다 보니 가슴 한구석이 촉촉해졌다.
식당 사장님은 밑반찬이 떨어졌는지 살피며 하나하나 챙겨주고 두 마리가 나온 보리굴비는 밥 한 공기에 다 먹지 못해 작은 반찬통에 싸 들고 돌아왔다. 다시 비가 오는 날 냉장고에서 남은 굴비를 꺼내 들고 찻물을 우렸다. 식당에서만큼 맛은 없었지만 갈증이 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식욕이 없을 때, 혼자라서 적적할 때 지겨움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반찬으로 보리굴비가 참 좋다.
임선영 음식작가·‘셰프의 맛집’ 저자 nalgea@gmail.com
○ 해남집=서울 강남구 강남대로160길 16. 영광보리굴비(2마리) 3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