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업계 ‘세기의 딜’이 성사됐다. 미국 시가총액 1위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글로벌 반도체 설계 원천기술 1위 기업인 ARM의 새 주인이 됐다. 이로써 엔비디아는 스마트폰부터 데이터센터까지 핵심 칩의 주도권을 쥔 기업이 됐다. 일각에선 정치적 중립을 지켜왔던 ARM이 미국으로 넘어가 미중 갈등의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스마트폰 두뇌 95% 독점 ARM, 엔비디아 품으로
엔비디아는 13일(현지 시간) 소프트뱅크로부터 ARM을 인수하는 최종 계약을 발표했다. 인수 금액은 400억 달러(약 47조 6000억 원)로 세계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M&A) 사상 최대 규모다.1990년 창업한 영국 기업 ARM은 전 세계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의 95%에 설계 기술을 공급하는 회사다. 스마트폰의 각종 프로그램을 실제로 구동하게 하는 AP 칩은 ‘스마트폰의 두뇌’라고 불린다. ARM은 이 AP칩을 비롯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태블릿PC 등에 쓰이는 각종 반도체 설계에 필수적인 원천 기술을 삼성전자를 비롯해 퀄컴, 애플, 화웨이 등 국적과 업체를 막론하고 반도체 설계 및 생산 기업에 고루 공급해왔다.
주요 외신들도 엔비디아의 시대를 예고했다. 이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오늘날)대부분의 사람들은 엔비디아나 ARM 기반의 제품 없이는 단 하루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엔비디아는 모바일 기기부터 데이터센터까지 모든 기술의 주도권을 쥔 반도체 기업이 됐다”고 평했다.
● 엔비디아, 삼성 경쟁자 될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2016년 ARM 인수에 성공했을 때만해도 ARM은 여전히 독자기업이란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엔 ARM의 고객사인 애플, 퀄컴의 경쟁사격인 엔비디아가 새 주인이 됐다는 점, 엔비디아가 중국과 테크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 기업이라는 점에서 우려도 적지 않다.파이낸셜타임스는 “워싱턴과 베이징 간 지정학적 갈등에 영국의 ARM이 제재에 노출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ARM의 공동 창업자 헤르만 하우저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에게 직접 이같은 우려를 전달한 바 있다. 이달 10일(현지 시간) 영국 야당인 노동당은 ARM이 미국 기업에 인수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일자리 유출 문제 등을 들어 매각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황 CEO는 “우린 ARM의 기존 오픈 라이선스 체제를 유지하며 향후에도 전 세계 어느 고객사를 대상으로도 납품할 것”이라며 “영국을 비롯한 곳곳에서 우린 오히려 기술자 고용을 늘릴 것이고, 연구개발(R&D) 투자도 더욱 늘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도 이번 M&A의 영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삼성전자 입장에선 애플 등 직접적인 경쟁사가 ARM을 인수하는 것보단 리스크가 크지 않을 수 있다. 최근 엔비디아는 신형 GPU 제품 위탁 생산을 삼성전자에 맡기는 등 양사는 협력관계다. 하지만 ARM 인수를 계기로 엔비디아가 GPU를 넘어서 테크 시장 전반으로 영역을 넓히려하고 있어 장기적으로 강력한 경쟁자가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RM은 그간 반도체 설계 원천 기술에만 주력하고 직접 설계나 생산에 뛰어들지 않았다. 엔비디아가 인수한 상태에선 장기적으로 AP를 직접 설계, 생산하려고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제 엔비디아가 삼성의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곽도영기자 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