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자리한 가운데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앞 왼쪽)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군사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신규진 정치부 기자
북한의 우리 군 감시초소(GP) 총격 사건이 일어난 5월. 사건 발생 열흘 뒤에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국방부 관계자의 이 발언이 논란의 불씨를 댕겼다. 북한이 아군 GP에 총격을 가한 것은 “9·19 군사합의 위반이 맞다”면서도 “합의는 잘 지켜지고 있다”는 ‘궤변’에 대부분의 기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북은 2018년 9월 18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이 모든 군사적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다.
사건 뒤 합의 위반에 대한 우리 군의 항의를 묵살하는 북한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음에도 이 관계자는 “한 번도 북한이 (직접) 군사합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며 북한을 두둔하는 해명을 이어갔다.
16일 인사청문회를 앞둔 서욱 국방부 장관 후보자(현 육군참모총장)도 국민의힘 윤주경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9·19합의가) 우발적 충돌 방지 등 군사적 긴장 완화에 구체적이고도 실효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며 “군사합의의 충실한 이행을 통해 지·해·공 접경 지역의 군사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이 상용구처럼 사용하는 ‘실효적’이란 문구를 어떻게 봐야 할까. 군 고위 관계자는 “군으로선 현 정부의 주요 외교안보 치적 중 하나인 9·19합의를 어떻게든 이어가길 원한다”며 “몇몇 위반 사례는 있지만 보수정부 때와 달리 북한의 전면전 위협이나 인명 피해를 낸 도발이 없었음을 부각시키려는 수사(修辭)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9·19합의 이후 남북의 후속 조치 이행 상황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이뤄진 게 거의 없다. 군사합의가 체결된 2018년 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와 GP 시범 철수 정도만 진행됐을 뿐이다.
한강하구 공동 이용이나 JSA 자유 왕래는 북한의 비협조로 지난해 9·19 1주년 이후로는 남북 간 논의가 한 발짝도 진척되지 않았다. 비무장지대(DMZ) 남북 공동 유해 발굴 사업도 지난해 4월부터 우리 군만 홀로 나섰다. 그러다 보니 군 내부에서조차 “(남북이 함께) 손뼉을 쳐야 하는데 우리 군만 혼자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 같다”는 자조 섞인 비판이 나온다.
반면 북한은 우리 군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9·19합의를 언제든 파기할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해 왔다. 올해 6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기 직전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있으나 마나 한 북남 군사합의”라고 으름장까지 놨다.
게다가 9·19합의의 적용 범위를 우리 군이 축소 해석하는 웃지 못할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다. 군사합의 합의서 1조에는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고 적시돼 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북한의 미사일 연쇄 도발에도 정부와 군은 ‘접경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6월 국회에서 북한의 연락사무소 폭파 행위에 대해 “9·19합의와 연관성이 없는 사안”이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 대선(11월 3일) 전후 북한의 도발 우려가 고조되는데도 군이 사문화되다시피 한 9·19합의에 매달려 안보의 본분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9·19합의를 ‘휴지 조각’처럼 여기며 2년 동안 위반과 적대 행위를 이어온 북한의 저의를 군은 어느 때보다 직시하고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신규진 정치부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