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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은 계절은 없다[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62〉

입력 | 2020-09-15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바람이 부니 좀 살 것 같다. 태양이 얼굴을 내미니 이제 숨을 쉬겠네!”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밭에 사는 나무들이 하는 말이다. 그 여름 동안 정말 힘들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가끔 듣던 말 ‘삼 년 가뭄은 견뎌도 석 달 장마는 못 견딘다’는 말을 실감했다. 가뭄도 고통스럽긴 하지만 어떻게든 견뎌낼 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석 달 내리 비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다. 이파리는 녹아내리고 뿌리는 썩는다. 포도나무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겨우 숨만 붙어 있었지만 발이 쑥쑥 빠져서 마음대로 밭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농부의 얼굴에 근심을 한가득 주고 살을 5kg 내려준 여름이었다.

그러나 9월이 왔다. 바람이 불고 해가 났다. 농부라면 이 바람과 빛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 것이다. 내 인생에서 9월이란 달을 이렇게 특별히 맞이해본 적이 있을까. 9월아 왜 이제 왔니? 하고 꼭 껴안았다. 농부는 예초기를 짊어지고 사흘 동안 잡초를 벴다. 비에 잘 크는 건 잡초뿐이다. 아니,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이건 무슨 풀이지?” 레돔이 묻는다. 벼였다! 작년 겨울에 밭고랑 가득 덮어준 볏짚에 붙어 있던 나락들이 싹을 틔워 석 달 장마에 어찌나 잘 자랐는지 알곡이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레돔은 밀 이삭과 비교하며 벼 이삭을 처음 본다고 신기해했다. “올가을에 탈곡기를 빌려 벼 수확을 해야겠다!” 농부는 잡초를 벤 부슬부슬한 땅을 밟고서 웃는다.

세상에 적당하게 습기를 머금은 폭신한 땅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없다! 잡초들을 베어 눕히니 밭에서 좋은 냄새가 올라온다. 막 베어낸 풀 냄새보다 더 좋은 향이 있을까? 없다! 우리는 쓰러진 나무들을 세워서 묶고, 포도 나뭇잎에 붙은 벌레들을 떼어낸다. 9월의 밭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을까? 없다! 밭고랑을 덮은 잡초 더미 위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다. 그것을 밟고 다니니 온 밭에서 갓 구운 빵을 화덕에서 꺼낼 때와 같은 따끈하고 구수한 향이 올라온다.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 없다!

“이거 한번 마셔 봐.” 양조장에 오니 레돔이 8월에 담근 로제 스파클링을 한 잔 내 온다. 폭풍우를 맞으며 딴 포도를 착즙할 때는 착즙기에 펑크가 났고, 발효 통에 들어가서는 냉각기가 멈춰버려서 굽이굽이 호랑이를 만났던 술이다. “아, 너희들 무사하구나!” 잔 속에 찰랑이는 로제 한 모금이 감동스럽다. “그럼요. 지금이 최고의 기온이에요. 9월은 와인이 익어가는 계절이거든요!” 장밋빛 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한 모금 쭈욱 마셔본다. 콕콕 강렬하게 쏘면서 한창 일하고 있는 효모향이 진하게 난다. 좋구나! 내 고장 7월이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면 양조장 9월은 와인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습한 더위를 벗어나 서늘한 계절로 가기 직전의 이 적당하게 좋은 느낌이 술맛에 그대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레돔은 알코올을 측정하고 산과 당의 변화를 본다. “아, 이제 안정적이야. 괜찮아.” 겨우 한숨을 돌린 표정이 된다. 농사도 하늘이 도와야 하지만 와인도 하늘이 도와야 한다. 하긴 하늘이 도와야 하는 것이 어디 이뿐이랴. 요즘은 엄마 생각이 자주 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장독대에 찬물 떠놓고 절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이었다. 산에 갈 때도 입구에서 합장 절부터 하고 나올 때도 절을 했다. 밭에서 호미질하다 멈추고 하늘에 대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늘님 이제 비 좀 내리주이소.” 엄마의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요즘은 나도 그렇다. 밭에 가면 합장은 아니지만 내 방식대로 인사를 한다. “안녕, 하늘아. 잘 좀 봐주라, 응? 응?” 내 기도 덕분인지 올여름도 그럭저럭 저물었다. 참 잘 견디었다. 이제 와인이 익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세상에 와인이 익어가는 이 계절보다 더 좋은 달이 있을까? 없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