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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히는 게 전략[서광원의 자연과 삶]〈26〉

입력 | 2020-09-21 03:00:00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살아 있는 것들을 잘 보면 뭔가 있다. 요즘 같은 가을에 주렁주렁 열리는 과일도 그렇다. 과일들은 대체로 빨갛거나 노랗다. 모양은 다들 제각각인데 왜 색깔은 비슷할까?

대부분의 열매는 여름까지 초록색을 띤다. 지나가는 동물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하도록 푸른 잎 사이에 몸을 숨기는 것이다. 설사 찾아서 먹는다 해도 후회라는 게 뭔지 금방 알게끔 떫거나 쓰다. 다시는 먹을 생각을 못 하게 학습을 시킨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이상해진다. 빨갛고 노란색으로 변해 눈에 쉽게 띄게 한다. 이러면 일 년 내내 고생한 성과를 한순간에 빼앗기지 않을까? 이상한 말 같지만 사실 그러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 먹히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그렇다. 덕분에 식물은 저 먼 백악기 이후 1억3000만 년 이상 번성해 왔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다고 가만있는 건 생명의 도리가 아니니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만든 게 져주면서 이기는 전략이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들이 한입에 꿀꺽 하게끔 해서 씨앗을 멀리 다른 곳으로 퍼뜨리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맛있는 과육을 만들고 그 안에 씨앗을 넣는다. 동물이 필요로 하는 걸 제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열매들이 대체로 빨갛고 노란색을 띠는 것도 이들 색이 새들과 덩치 큰 포유류에게 잘 보이기 때문이고, ‘상품 출시’ 시점을 가을로 택한 것 또한 수요가 가장 많을 때여서다. 멀리 이동해야 하는 철새들이나 겨울을 나야 하는 동물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들 먹히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먹히는 전략이라니! 기발한 역발상이다.

이뿐인가? 자기만의 고객을 설정한 후 라이프스타일까지 감안한 마케팅을 펼친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인 사과는 동면에 들어가는 곰을 ‘표적 고객’으로 삼아 크고 강렬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반면 산수유는 겨울에도 찾아오는 새가 고객이기에 열매를 금방 떨어뜨리지 않고 겨울 내내 작고 빨간 열매를 단다. 곰이 동면에 들어가는 이후가 되면 사과를 볼 수 없지만 한겨울에도 산수유를 볼 수 있는 이유다. 겨울에도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나무가 아닌 토마토나 호박 등은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하기에 사과보다 더 강렬하게 어필한다. 다들 빨리 먹히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먹혀야 다음 생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참외는 너무 오래 동물의 배 속에 있지 않기 위해 설사를 유도하는 물질을 씨앗 껍질에 담기까지 한다.

언젠가 아는 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 “중고생 시절 아버지와 팔씨름을 해서 이길 때마다 어깨를 으쓱대며 힘자랑을 하곤 했는데, 아들을 키우면서 내가 실제로 이긴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져줄까? 져주는 게 둘 다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이치가 참 비슷하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