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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종손들 “어른이 먼저 ‘올해는 만나지 말자’ 정해줘야 편해”

입력 | 2020-09-21 03:00:00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2020]
집안에 환자나 연로한 분 있다면 안만나고 차례 쉬는 게 현명한 예법
성묘도 시기 옮겨 하거나 단출하게
丁총리 “가족과 함께하는 명절 아닌 가족 위하는 명절 되길 희망” 당부




추석땐 거리 두기 “오지마, 괜찮아” 마음만 곁에 두기

“추석 연휴에 가던 처가와의 여행도 올해는 취소했습니다. 우리 식구 4명이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서울서 ‘거리 두기’를 지킬 거예요.”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인 이창수 씨(55)가 밝힌 올 추석 계획이다. 석주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선생의 집안은 500년 역사를 지닌 경북 안동의 유림 명문가로 전국서 가장 규모가 큰 사대부 반가(班家)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가가 항일운동에 투신해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오랜 명문가인 만큼 제례(祭禮) 규모와 절차가 성대하고 까다로울 법하다. 그러나 명절 차례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씨는 “26년 전부터 모든 제사를 광복절 하루에 지내고, 추석 차례는 벌초 대행 후 10월 말 산소를 찾는 걸로 대신한다”고 말했다. 1744년 작성된 집안의 제사 지침에 이미 ‘제사상을 간소하게 하라’고 적혀 있다. 이 씨는 “제사 때문에 식구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 집안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산소에 갈 때도 이 씨와 동생 아들이 술 과일 포만 챙겨 단출하게 간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고려해 처가와의 여행 계획도 잡지 않았다. 그는 “조상을 기리는 마음만 있다면 그 형태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 씨 집안의 ‘거리 두기 추석’은 코로나19 상황에서 현명한 명절예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가족과 친지의 건강이 중요한 만큼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연세 많은 어르신이 있다면 만나지 않고, 차례도 쉬는 것이 올바른 ‘신예기(新禮記)’인 것이다. “그래, 올해는 괜찮으니 오지 말라”고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이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덕담이다. 요양시설에 계신 어르신을 찾아뵙는 것도 가급적 시기를 미루는 것이 좋다.

선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종 문헌에는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거나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제사나 차례를 생략했다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조상들도 전염병이 돌거나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모든 행사를 포기했다”며 “조상에게 오염되지 않은 정갈한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접촉을 최소화해 역병을 극복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20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이번 추석은 가족과 함께하는 명절이기보다 가족을 위하는 명절이 되길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임우선 imsun@donga.com·박재명 기자

명문가 종손들 “어른이 먼저 ‘올해는 만나지 말자’ 정해줘야 편해”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2020]
<上> ‘비대면 추석’ 실천하는 어른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어르신들부터 추석 기간 이동과 만남을 줄이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광주 이씨 문익공 종가의 종손인 이필주 씨(위쪽 사진 가운데)가 17일 종친들과 함께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고택에 모여 비대면 추석을 권하는 내용의 문구를 든 모습. 아래쪽 사진은 최근 한글을 깨친 황계분 할머니(왼쪽)와 안상연 할머니가 자식들에게 귀성하지 말라는 편지를 써서 들고 있는 모습. 칠곡군 제공

“느그 콜레라, 아니 코로나 때메 요새 학교도 못 가제? 추석 때 오지 말그라. 나중에 더 반갑게 만나제이. 사랑한다.”

양소자 할머니(82)는 휴대전화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머리 위로 ‘손 하트’를 그렸다. 두 아들 내외와 손주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다. 경북 의성군은 최근 홀로 사는 노인 1873명의 영상을 촬영해 자식들에게 보냈다. 추석 이동을 참아 보자는 취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언택트 추석’을 만들고 있다.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고, 친지들과 거리를 두며, 최대한 ‘집콕’ 하는 것이 올 추석 때 최선의 예법이다.

○ “올 추석에는 만나지 말자” 먼저 말해주세요
코로나19의 위중함을 아는 어르신들은 ‘추석 신예기(新禮記)’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조선 후기 대사헌을 지낸 귀암 이원정의 13대 종손 이필주 씨(78)는 종친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올 추석 때 고택(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원래 종가에 50명 이상 모인 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인사하는 게 전통”이라며 “어린아이들도 있고 노인들도 있는데 얼굴 마주 대고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보다도 종손인 내가 직접 나서서 오시지 말라고 요청드렸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칠곡군이 진행하는 ‘언택트 추석 캠페인’에도 동참했다. 그는 “정부에서도 조바심이 나서 당부하지 않느냐”며 “가족들 한 번 안 만난다고 큰 탈이 날 일도 없다”고 말했다.

퇴계 이황 선생의 17대 종손인 이치억 씨(44)는 “우리는 원래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며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성묘를 하는데 올해는 코로나19를 감안해 방역당국의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을 지키도록 노력하려 한다”고 말했다.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퇴계 이황의 종가는 예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제사상도 단출하기로 유명하다.

칠곡군에 사는 최삼자 씨(73)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아들아! 이번 추석은 마음만 보내고, 그리움은 영상으로 채우자”라고 쓴 손 편지를 올렸다. 그리고 지인에게 손 편지 캠페인을 권했다. 루게릭병 환자를 위해 릴레이 방식으로 얼음물을 뒤집어쓰던 ‘아이스버킷 챌린지’처럼 ‘추석 때 오지 마라 챌린지’가 진행 중이다.

이처럼 어르신들이 직접 나선 건 가족들이 마음 편히 따라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각 집안에서 종손들이 간소한 명절을 지내는 것처럼 각 가정도 어르신들이 먼저 ‘만나지 말자’고 결정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여전히 명절에는 가족이 모여야 한다고 여기는 집안도 있다. 자칫 가족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특히 양가 중 한쪽은 거리 두기를 지키는데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그렇다. 또 누군가는 ‘가까이 산다면 잠시라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최모 씨(48)는 “양가 모두 경기도에 계신데 처가는 ‘오지 말라’고 하는 반면 본가는 ‘금방이면 오는데 잠깐 들르라’고 하신다”며 “본가에 가면 스무 명 넘게 모이기 때문에 난감하다”고 말했다.

올해는 평소 명절보다 갈등이 더 커질 수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아예 추석에 이동 금지령을 내려 달라거나 연휴를 없애 달라는 글까지 올라온다. 갈등을 줄이면서 거리 두기 추석을 지키려면 올해만큼은 양가 모두에 분명한 ‘원칙’을 세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원칙을 세웠다면 “추석에 못 간다”는 말은 며느리나 사위가 아니라 아들, 딸이 직접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꼭 필요한 ‘비대면 명절’이 자칫 고부(姑婦) 갈등이나 장서(丈壻)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 ‘조건부 언택트’, ‘추캉스’는 안 됩니다

거리 두기 추석을 실천하려면 ‘깔끔하게’ 안 만나는 게 중요하다. 고향집 대신 중간 지점이나 여행지에서 만난다거나, 추석 연휴 때 안 만나는 대신 전후에 만난다거나 하는 식의 조건을 붙이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조건부 언택트’를 저울질하는 이들이 많다. 서울에 사는 손모 씨(41)는 “부모님을 아예 뵙지 않기는 좀 그래서 같이 서울 인근 캠핑장에 다녀오려고 한다. 아무래도 야외니까 더 낫지 않겠냐”고 말했다. 강원도와 제주도 숙박업소들은 20일 현재 이미 추석 연휴 기간 예약이 다 찬 곳이 많다. 야외로 추캉스(추석+바캉스)를 택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는 시기를 피하겠다는 취지로 추석 연휴 1, 2주 전이나 후에 귀성 또는 가족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방역당국은 이 역시 “명절 사회적 거리 두기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재명 jmpark@donga.com·사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