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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일본해 대신 번호로[횡설수설/김영식]

입력 | 2020-09-23 03:00:00


국립해양조사원은 2006년부터 각국 해양업무 담당 공무원들을 초청해 최신 해양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2015년부터는 개발도상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국제수로기구(IHO)가 인증한 ‘해양조사기술연수’를 해왔다. 참가자들은 해도(海圖)에 대한 기초이론과 전자해도 등을 배운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IHO의 동해 병기 결정을 막으려고 로비하는 일본에 맞서 기술 지원을 통해 IHO에 호의를 표시하는 우리의 대응방식이다.

▷국제 해양 명칭의 표준을 결정하는 국제기구인 IHO가 해도에서 명칭 대신 숫자로 된 ‘식별 번호’를 사용한다고 한다. 아날로그 시대 각국의 해도 제작 지침이던 ‘해양과 바다의 경계(S-23)’ 대신 디지털 시대의 해도 ‘S-130’ 제작에 나서는 것이다. 전 세계 바다 표기가 모두 숫자로 바뀌게 된다.

▷광개토대왕비에도 있는 동해라는 이름이 일본해로 둔갑한 건 1929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IHO가 처음으로 ‘해양의 경계’를 발행하면서 일본의 일방적 주장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속 터질 일이지만 1991년 유엔 가입 전에는 이런 문제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듬해 유엔지명표준화회의를 계기로 국제무대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동해 병기 전략으로 접근했지만 꽉 막힌 일본은 난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양국 간 해협을 영국해협(English Channel)과 라망슈(La Manche)로 병기한 융통성만 일본이 보였어도 한일 양국이 이름에 목숨을 거는 외교력 낭비는 없었을 것이다.

▷지도에서 황해, 동해, 걸프만 등의 이름이 사라지고 숫자로 표시되면 역사적인 맥락마저 함께 잊힐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일본해’ 단독 표기를 막았고, 일본은 ‘동해 병기’를 막는 절충점을 찾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일 간 명칭 싸움에 회원국들이 지쳐가자 마티아스 요나스 IHO 사무총장이 디지털 접근법을 제시했다고 한다.

▷디지털 해도 제작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불분명하고 IHO가 기존 S-23 출판물을 폐기하는 것도 아니니 우리로선 아쉬움이 크다. 게다가 IHO가 디지털 번호를 부여해도 전 세계 대중들이 접하는 일반 지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동해 병기를 하는 세계 각국의 지도는 2000년대 초반 2%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40%를 넘는다. 구글맵은 한글판 버전 외의 지도 초기 화면에 일본해로 표시된다. 단일 지형에 단일 지명을 쓰는 미국이나 유엔의 공식 지도에도 병기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IHO의 표기방식 변화는 동해 병기 외교전의 끝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다.

김영식 논설위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