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타워링


이정향 영화감독
전 세계의 소방관들에게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하는 영화는 소방대장 스티브 매퀸의 활약이 돋보이지만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공동 주연인 건축가 폴 뉴먼한테 반했다. 기말고사가 끝난 날 단체관람으로 간 극장이기에 출석 체크만 하고 빠져나올 생각으로 출입문 앞에 서서 객석의 불이 꺼지길 기다렸던 나는 3시간 후에야 극장을 나왔다. 극장 밖으로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몇 시간 전의 내가 아니었다. 마치 지구의 축이 반대로 기운 것처럼 모든 것이 변했다. 머릿속엔 폴 뉴먼밖에 없었고, TV의 주말 명화도 보지 않던 내가 밥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폴 뉴먼에 대한 호감이 문어발처럼 퍼져서 1년 뒤,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접한 참사는 거의가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방화와 세월호까지. 하지만 사고 발생 직후에 대처만 제대로 했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는 없었을 거다. 부실시공에 안전점검도 제대로 안 한 성수대교는 붕괴의 조짐을 본 시민의 신고가 1시간 전에 있었음에도 교량 진입을 통제하지 않았다. 불법으로 설계를 바꾼 삼풍백화점은 붕괴 당일 오전에 지금 당장 영업을 중단하라는 보수업체의 말을 따랐다면 사상자 1500명은 무사했을 거다. 정작 불이 난 열차보다는 화재 사실을 전달받지 못한 채 승강장으로 들어선 반대편 열차의 승객들이 대거 희생된 대구 지하철 사고는 잇따른 미숙한 대처로 몸집이 불어난 안타까운 참사다. 세월호 사고도 그렇다. 노후 선박, 과적, 부주의한 운항으로 인해 발생했지만 모두를 신속히 갑판 위로 대피시켰다면, ‘전원 구조’라는 오보로 골든타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무엇보다도 선장이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거다.
이정향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