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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지주사 체제 잘 갖추고, 기업규모 작을수록 ‘줄소송 위협’ 노출

입력 | 2020-09-28 03:00:00

재계 ‘다중대표소송제’ 반발
지주사 지분 0.01% 챙긴 투기자본, 소송 빌미로 자회사 흔들 가능성
정부가 지주사 권유… 되레 타격, 자산 5조 미만 중소-중견 지주사
60곳중 58곳 ‘1억 지분’으로 소송… 14곳은 1000만원으로도 가능




한국 대표 식품회사인 풀무원은 지난해 선진국형 지주사 체제를 확립한다고 밝히며 자회사 지배력을 높였다. ㈜풀무원이 풀무원식품(94.75%), 풀무원다논(69.33%) 등을 두는 체제다. 하지만 상법 개정안의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되면 지주사인 풀무원 주식 약 4200만 원어치(2019년 종가 기준)만 사도 풀무원식품 등의 경영진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27일 동아일보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자산 5조 원 미만 상장 중소·중견 지주회사 60개를 조사한 결과, 상법 개정안의 다중대표소송제는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지주사 체제를 확고히 갖출수록 소송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주사 시가총액이 낮으면 소액으로 소송에 필요한 최소 지분인 0.01%를 확보하기 쉽고, 지주사가 지분 50% 이상을 갖고 있는 자회사가 많을수록 소송 대상 자회사가 늘어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사한 60개 지주회사 중 한미사이언스㈜와 ㈜오리온홀딩스를 제외한 58곳이 1억 원 미만으로 다중대표소송 최소 필요 지분인 0.01%를 확보할 수 있었다. 1000만 원 미만으로 지분 0.01%를 살 수 있는 곳도 14곳이나 됐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정부가 순환출자 등을 정리하고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길 권해 왔기 때문에 비용을 들여 지주회사 체제를 갖췄더니 더욱 타격을 받게 되는 제도”라며 “업종을 망라하고 특히 경제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중소·중견기업들이 각종 세력에 휘둘릴 수 있다”고 반발했다.

다중대표소송제의 취지는 대주주가 자회사를 통해 일감 몰아주기에 나서는 행위 등을 소수 주주가 막을 수 있도록 이들에게 경영감독권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앞서 법무부는 6월 입법예고를 하면서 손해배상 청구 금액이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아니라 자회사에 귀속되기 때문에 다중대표소송이 남발될 우려가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중소·중견기업의 경우 소액 지분만으로도 자회사에 대한 소송이 가능해 남발될 수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소송이 들어가면 주가가 하락하기 때문에 주식 시세차익을 노린 개인투자자들도 얼마든지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산 10조 원 이상 대기업집단의 지주사도 주주 연합이나 기관투자가의 다중대표소송에 취약할 수 있다. SK그룹 지주사인 ㈜SK 주식 약 13억7000만 원어치를 보유한 주주는 자회사인 SK E&S, SK바이오팜, SK실트론 등에 소송을 걸 수 있다. LG그룹 지주사인 ㈜LG 주주도 약 12억7200만 원의 주식을 보유하면 LG CNS 등에 소송이 가능하다.

재계 관계자는 “엘리엇 등 행동주의 펀드는 가능한 한 적은 자금으로 그룹 전체를 흔들 수 있는 계열사에 투자한다”며 “자회사에 대한 소송을 빌미로 먼저 각종 요구사안을 내놓고 협상을 시도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에서는 모자회사가 100% 지배관계이거나 경영진이 같아 사실상 하나의 회사인 경우에만 다중대표소송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이 속한 대륙법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다중대표소송을 명문화하고 있는데, 100% 지배관계에 있는 모회사 주주가 6개월 이상 주식을 계속 보유했을 때만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한다면 일본처럼 자회사 주주가 없는 완전모자회사인 경우에만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다중대표소송제뿐 아니라 이른바 공정경제 관련 법안들은 기업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검찰에 고발하기 쉽게 만들고 있다”며 “사법 리스크가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허동준 hungry@donga.com·서동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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