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순덕의 도발]文 대통령은 왜 구출 지시 하지 않았나

입력 | 2020-09-28 16:55:00


여자가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미련 때문이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못할 일을 당하고도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사람은 대체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도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다며, 한사코 안 믿으려 든다.

우리 국민이 북한에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월북이든 불법침입이든, 북쪽 해상으로 넘어간 해양수산부 어업지도원이 북한군에 발견됐다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오후 6시 36분 이 첩보를 서면으로 보고받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의례적일지언정 ‘구출에 최선을 다하라’ 같은 지시도 없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나 이상하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사라져도 찾아나서는 게 인지상정이다. 북한은 원래 이상한 집단이라 치고, 왜 문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전화로든 서면으로든 지시하지 않았는지 정말이지 납득되지 않는다.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해양수산부 서해어업지도관리단 소속 공무원 이모 씨가 실종되기 전 탑승했던 무궁화10호(오른쪽)가 25일 연평도 인근을 항해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 리비아 납치 때 “국가의 모든 역량 동원해 구출하라”


만일 문 대통령이 어떤 지시라도 내렸다면 우리 국민이 그렇게 죽진 않았을 거다. 아무리 월북 의사를 밝힌 사람이라 해도 국가정보원이든 판문점 연락사무소를 통해서든, 대한민국 정부가 지켜보고 있음을 북에 알렸다면 생환은 못 시켜도 북에서 함부로 죽이진 못했다. 대통령에게는 북한 김정일에 친서까지 보낸 핫라인이 있지 않은가.

우리 국민이 리비아 무장단체에 억류됐던 2018년 8월, 청와대는 “납치된 첫날 ‘국가가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 구출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김의겸 당시 대변인은 “정부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안전과 귀환을 위해 우방국들과 긴밀한 협력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그의 조국과 그의 대통령은 결코 그를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결국 억류 315일 만인 2019년 5월 16일 석방돼 이틀 후 귀국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단 한 사람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문장이 올해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에 없었으면 또 모른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도 24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서욱 국방부 장관에게 “실종 공무원이 살아있던 22일 오후 6시 36분 서면보고 때 문 대통령이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나”라고 캐물었다. 임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국방장관 서욱이 암만 서류를 뒤적여도 대통령 지시는 적혀 있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제75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영상으로 전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 대통령은 서면보고서를 보고도 편히 잤을까
혹시 문 대통령이 서면보고서를 보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든다. 그 서면보고서가 대통령의 집무실로 전달됐는지, 퇴근 후여서 관저로 올라갔는지 청와대는 밝히지 않았다. 만일 서면보고서를 보고도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설령 구출 지시는 안 했더라도, 궁금해하지도 않은 점이 납득되지 않는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때는 관저로 전달됐다. 오전 10시 12~13분께 위기관리센터 상황병이 상황보고서를 들고 관저 입구까지 뛰어가 7분 만에 경호관에게 전달했으나 서류는 침실 앞 탁자 위에 올려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2016년 11월 청와대는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거짓 발표를 했다. 그날 오전 10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서면보고를 받고는 10시 15분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전화로 국가안보실장에게 지시했다는 거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5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외교안보특위 위원 긴급 간담회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 끔찍한 죽음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닌가

참모진은 22일 밤 10시 30분 북에서 우리 공무원을 사살하고 불태웠다는 첩보를 접하고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이 첩보를 놓고 23일 새벽 1시부터 안보실장, 비서실장,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국방부장관이 관계장관회의를 열면서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건 너무나 기이하다.

새벽 1시 30분부터는 미리 녹화한 대통령의 유엔연설이 공개되고 있어 더욱 이상하다. 대통령도 깨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북 종전선언을 제안하는 연설 내용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대통령은 남북 간의 불상사를 모르고 있는 게 낫다고 ‘정리’했을 수도 있다.

결국 문 대통령이 이 끔찍한 첩보를 알게 된 것은 우리 국민이 사망한 지 10시간 만인 23일 오전 8시 30분이라고 한다. 대면(對面)보고 후 “정확한 사실 파악이 우선이다. 북에도 확인을 하도록 하라. 만약 첩보가 사실로 밝혀지면 국민이 분노할 일이다.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지시는 침착하기 그지없다.

대통령에게는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북한이 시신을 불태웠다는 첩보가 맞는지, 그게 사실이면 국민이 분노할 일이 더 관심사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고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매우 유감스럽다”는 대통령 입장이 나온 것은 대면보고 이후 하루 반나절이 지난 24일 오후 5시 10분이었다.




● 제 국민보다 북한 김정은이 더 중한 사람들


충격과 유감도 잠깐이다. 25일 오전 북한 김정은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통지문을 보내오자 정부 여당의 분위기는 감격과 감읍으로 돌변했다. 문 대통령은 28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정부로서 송구한 마음”을 밝히면서도 “이번 비극적 사건이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계기로 반전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여당에서 쌍수 들고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이나 북한 개별 관광 촉구 결의안을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인 듯하다.

정부 여당에는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북한 김정은이 백배천배 더 중하다는 사실이 이보다 명백할 순 없다. 이제는 미련을 버릴 때가 됐다. 설마 제 국민보다 북한 김정은을 더 위하는 건 아니겠지.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북핵을 포기시키려는 것이겠지. 우리 국민이 참혹한 죽임을 당했는데도 문파들은 대체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김정은도 사람인데, 문 대통령도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다며 한사코 안 믿으려 든다.

김정은이 계몽군주라는 데 동의한다면 문파들의 대통령이 ‘깨몽군주’라는 것도 인정해야 할 때가 됐다.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대한민국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을 더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이 꿈에서 깨지 못한다면 국민이라도 깨어나야 한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