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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벌리면 잡힐 듯 너머엔…‘웅웅~’ 뒤섞인 TV소리만[히어로콘텐츠/증발]

입력 | 2020-10-06 03:00:00

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2> 증발자들의 공간, 미래고시텔




서울 한복판에 ‘증발자들의 공간’이 있다. 잘나가던 세무사, 돈을 쓸어 담던 회사 대표, 평생 ‘성실의 교과서’처럼 살아온 근로자 등이 이곳에 산다. 이들은 노동력 착취, 사업 실패, 병마(病魔) 등을 견디다 못해 세상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삭제해버렸다. 이들은 가족, 친구로부터 ‘증발’했지만 자기 자신까지 날려버리지는 않았다. 증발자 4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봤다.

서울 서부역 인근, 왕복 8차로를 따라 인력사무소, 잡화점, 기사식당 등이 줄지어 있다. 대로변에서 한 발 안쪽으로 들어서면 실핏줄 같은 골목들이 이어진다. 그중 하나로 100보쯤 걸어 들어가면 간판 하나가 나온다. 하얀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자그맣게 적힌 다섯 글자. ‘미래고시텔.’

다닥다닥 붙은 건물 사이로 낡은 회색 벽돌을 두르고 있는 2층 건물이 간판의 주인이다. 좁은 시멘트 계단으로 연결된 1층과 2층,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10여 개의 방문이 보인다. 어른이 누워 팔다리를 벌리면 공간이 얼마 남지 않는 작은 방들이 모여 있다. 방마다 구조도, 이불도, 채광도 제각각이다. 공통점은 모두 TV가 있다는 것뿐. 이 방 저 방에서 TV가 켜지면 어두운 복도에 여러 채널의 소리가 뒤섞여 웅웅 울린다.

저마다의 사연을 감당하지 못해 자발적 실종을 택한 사람들, 그러나 엄연히 속세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곳 어느 방엔가 머물고 있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여니 증발자들의 소행성 4개가 등장했다.




105호 김모 씨
돈 쓸어담던 사업, 순식간에 부도
공공근로 시작하며 몸과 마음 안정


올해 1월 칼바람이 불던 어느 날, 누군가 105호 문을 똑똑 두드렸다. 오후 7시가 넘어 사방이 어둑했다. 김모 씨(60)는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사람들을 피해 정착한 곳이기에 불청객이 반가울 리 없었다.

서울 한 경찰서에서 왔다는 형사가 “부인께서 실종신고를 하셨는데요”라고 입을 뗐다. 얼마 전 전입을 신고한 새 주소지 기록을 확인해 찾아왔다고 했다.

김 씨는 “저는 절대 돌아가지 않습니다. 제가 어디 있는지 알리지 마세요. 잘 있다고 전해는 주세요”라며 문을 닫았다. 현행법상 경찰이 실종신고를 받고 당사자를 찾더라도 성인의 경우 동의 없이 위치를 신고자에게 알릴 수 없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대기업에서 ‘기획통’으로 통하던 김 씨는 사업가 기질도 다분했다. 회사를 나와 차린 인테리어 회사는 그야말로 돈을 긁어모았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넘쳐나는 돈도 좋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출근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특히 날마다 한결같이 “우리 남편 파이팅!”이라고 외쳐주는 아내가 너무 좋았다.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고수익률을 제시한 지인의 설득에 넘어가 큰돈을 투자했다. 2000년 초반,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끝까지 곁을 지킬 줄 알았던 가족의 균열이 먼저 찾아왔다. 아내와 딸은 차가워졌다. 김 씨는 점점 집안에서 ‘있으나 없는’ 존재로 변해갔다. 건물 관리인, 보안업체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지만 화려한 삶을 되찾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도 망가졌다. 2009년 개복 수술로 종양을 떼어낸 후 가족 관계는 더 삭막해졌다. 그는 “위기를 겪으면 가족이 돈독해진다는 말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늬만 남편, 무늬만 아버지’이던 그에게 아내는 지난해 초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혼기가 찬 딸이 결혼할 때까지만이라도 멀쩡한 가족인 척하고 싶어 애써 외면했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이혼을 거부했지만,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독한 알코올만이 그를 위로했다.

지난해 6월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여느 때처럼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왔는지 술병을 든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이러다 죽나? 근데 뭐… 죽어도 상관없지.’ 이상한 충동이 그의 온몸을 두들겨댔다.

옷가지와 신발을 잡히는 대로 배낭에 쑤셔 넣었다. 많은 짐이 필요치 않았다. 집을 막 나서려는 찰나, 방에서 나온 아들이 어디 가냐고 물었다. 긴 말이 필요치 않았다. “나 갈게, 잘 있어”라고 답했다. 김 씨가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중독 증세와 손 떨림이 바깥 생활 1년여 만에 사라졌다. 시장에서 공공근로 일을 하면서 신기하게도 몸과 마음에 안정을 찾았다. 거리 곳곳에서 만난 이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도 받지 못하며 사는 현실을 바꾸고픈 생각까지 들었다. 미래고시텔에서 노무사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제가 뭐라도 도울 게 있지 않을까요. 저 나름 공부 잘했거든요”라며 웃었다.




103호 김모 씨
가족을 잃고 세상에 미련 안남아
교회서 사귄 지인이 유일한 통로


“조금만 같이 있으면 안 되겠냐.”

2018년 어느 가을 날, 김모 씨(51)의 병실로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병실로 돌아온 직후였다. 한참 동안 같은 병원, 다른 층 병실에 입원 중인 부자(父子)의 하루하루는 평안할 리 없었다. 이날따라 아버지의 부탁이 김 씨에게는 더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매일같이 “답답하다”,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채던 아버지였다. 김 씨는 “아유, 됐어요 아버지. 규정상 병실 간 이동이 안 되는 시간이에요”라고 타이르듯 수화기를 내려놨다.

몇 시간 뒤 병원 관계자가 “지금 빨리 와보셔야겠다”며 헐레벌떡 김 씨를 불렀다. 아버지가 병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86세 고령에 중증 폐렴으로 투병 중이던 아버지는 병마와의 전투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김 씨의 어머니는 가족을 못 알아볼 정도의 중증 치매로 오래전부터 요양원에 입원해 있던 터라 충격은 김 씨가 오롯이 감내해야 했다. 20대부터 계속된 결핵 치료를 마치고 퇴원을 불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김 씨의 인생은 온통 병마와의 싸움이었다. 어려서부터 결핵을 심하게 앓아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세 번의 큰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아버지의 폐렴 수발을 들면서 본인의 병도 챙겨야 하는 이중고였다. 병세가 나아지면 식당일, 옷 장사 등 돈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다. 아버지 병원비를 벌어야 했기에 꿋꿋하게 버텼다. 그런 그를 버티게 한 동력, 아버지가 사라진 순간 그는 무너져 내렸다.

“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어요. 모든 미련이 사라져버렸다고 해야 하나.”

김 씨의 병세는 호전돼 원래 일하던 회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굳이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여기저기 떠돌기 시작했다. 3년간 떠돌다 미래고시텔까지 흘러왔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었는데, 다 끊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정착하면서 예기치 못한 끈이 생겼다. 인근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다. 유일하게 마음 붙인 교회에서 그는 유통회사 근무 경험을 살려 사무 업무를 돕고 있다.

103호는 이제 그에게 제2의 세계다. 선반 위에 놓인 어버이날 축하 카네이션 조화와 한 장의 사진이 새로운 인생을 보여준다. 교회에서 알게 된 지인의 자녀와 김 씨의 웃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다. 김 씨는 “얘요? 친딸은 아니죠. 그래도 그냥 딸내미라고 불러요. 저한테 아버지라며 꽃도 주는걸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증발 끝에 새 인생을 만든 김 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 같은 사람들은 질병, 가난, 모든 힘든 상황이 다 본인 탓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힘든 순간에 사회가 도울 장치가 있었다면 이런 삶을 살진 않았을 수도 있죠. 물론 개인의 잘못된 선택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끝내 우리를 고립시킨 건 사회라고 생각해요.”




201호 황모 씨
거금 투자했는데 한순간에 등돌려
석달만 떠난다는 게 어느새 17년


구석 선반 위에 빳빳한 주민등록등본 한 부가 놓여 있다. 증발자와 등본이라니 어색한 조합이다. 황모 씨(65)가 등본을 손가락으로 쿡쿡 찍으며 말을 뱉는다. “이놈 이놈, 이것 봐. 옆에 아무도 안 적혀 있어. 아직도 결혼을 안 한 거지. 나이가 꽉 찼는데 말이야.”

황 씨는 17년 전 그가 알던,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을 떠났다. 이후로 그는 등본상으로만 부인과 아들을 만난다. 습관처럼 종종 등본을 떼어 본다.

주소도, 가족 구성도 수년째 그대로다. 지금이라도 찾아가면 얼마든지 가족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황 씨는 자신의 터전에서 증발해버린 지금의 자신이 더 견딜 만하다.

그의 인생 전반부는 한마디로 폼이 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의 대형 은행에 들어갔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세무공무원이 됐다. 연수원 성적이 좋아서 발령을 받기도 전에 ‘연수원 1등이 우리 세무서에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잠시 시련도 있었다. 성과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후배가 먼저 승진했다. 일이 몰려도 ‘1등’이라는 자부심에 버티던 그는 조직에 쓴소리와 함께 사표를 냈다. 안정적인 자리를 떠나겠다고 하자 가족들 반대가 엄청났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서울 성동구에 세무사무소를 차렸다. 직원은 나날이 늘었고, 아파트와 차는 갈수록 커졌다. 아내가 여유롭게 백화점을 다닐 정도로 가족 모두 풍족한 삶을 누렸다.

모두가 곡소리를 내던 1997년 외환위기 때도 황 씨는 오히려 수입이 늘었다. 너무 자신만만했던 걸까? 너무 탄탄대로만 걸었던 걸까? 의외의 복병에 무너졌다.

부산에서 상경한 뒤 늘 고향 친구들 중에 제일 잘나가던 그는 ‘대장’ 같은 존재였다. 돈 좀 빌려달라는 친구, 투자를 해달라는 친구, 동업을 해보자는 친구 모두 황 씨가 거뒀다.

2000년대 초반, 이들이 줄줄이 악수(惡手)가 됐다. 그가 대출까지 받아 거금을 투자한 친구의 말이 점점 달라졌다. 돈을 빌려간 친구도, 동업했던 친구도 빚을 갚아야 하는 순간 “미안하게 됐다”며 등을 돌렸다. 그간 씀씀이가 너무 컸던 탓일까. 카드 연체금이 밀렸고, 자금줄도 하나씩 막혔다.

삶은 180도 달라졌다.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 서울의 넓은 아파트에서 쫓겨나 외곽의 단칸방으로 옮겼다. 꾸역꾸역 버티던 세무사무소의 일감이 끊기면서 친구 술집에서 카운터 일을 맡았다. 마음 한편엔 ‘금세 재기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 같지 않았다. 지인들이 등을 돌리며 그의 자금줄, 아니 목숨줄을 조여 오던 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한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줬더라면 하나씩 탁, 탁,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친구들에 대한 원망, 동료들에 대한 수치심,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등이 뒤섞여 견딜 수가 없었다. 2003년 어느 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이 차올랐다.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몇 달만 나가 있겠다”며 출근하듯 집을 나섰다. 3개월만 떠나자 했던 것이 어느새 17년이다.

지난날을 떠올리던 그는 대뜸 무협소설 속 한 구절을 인용했다. “중국 무협소설 보면 갑자기 날 찾아오는 사람은 다 나를 죽이려고 오는 거야. 40대까지만 해도 진짜 친구가 있었지. 그런데 쉰 살 넘으면 진짜 친구도 없어. 다 나를 등쳐먹고 배신하는 거지. 사람도 싫고 세상에 미련도 없어.”

사람도 세상도 싫다는 그는 어둠이 내리면 미래고시텔 인근 다시서기센터(서울시 노숙인 지원기관)로 나가 밤새 노숙인 도우미로 일한다. 어쩌면 아직 사람과 세상이 그리운 것일지 모른다.

203호 김원배 씨
사람 좋다고 부려먹곤 내팽개쳐
남은 건 우울증… 그래도 버틴다


수선집에서 옷감을 나르고 옷을 다릴 때도, 꽃집에서 물때를 닦고 화환을 나를 때도, 공사장에서 벽돌을 쌓고 용접을 할 때도 몸을 사려 본 적이 없다. 스무 살 무렵부터 궂은일로 단련된 김원배 씨(42)는 ‘성실의 교과서’ 같은 사람이다.

그가 일했던 곳마다 사장들의 말은 놀랄 만큼 똑같았다. “수습 교육부터 받으면서 일을 익혀야지. 잘하면 금방 월급 올려줄 거야!”

진득하고 묵묵하게 일했다. 그런데 한곳에서 5년 넘게 일을 해도 월급은 몇 년째 60만 원 안팎, 제일 많이 준 곳이 80만 원을 조금 넘었다.

인성도 능력이라는 시대. 하지만 김 씨에게는 바른 인성이 독이었다. 김 씨는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남들이 자신을 ‘착해빠져서 부려먹기 좋은 놈’이라고 보는 줄 몰랐다. 좋은 사장님이라 믿고 몇 년 일하다 보면 한참 뒤에야 ‘내가 이용당하고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왔다.

반복되는 착취에도 비빌 언덕이 없었다. 김 씨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는 아픈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거액의 빚과 함께 살았다. 부모님이 고향에 남기고 떠난 집마저 빚 때문에 더는 머물 수 없는 곳이 됐다.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찾아다니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2005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마음 둘 곳이 남지 않은 그는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씀씀이를 아끼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도 늘 통장 잔액보다 상처가 더 크게 남았다.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돈마저도 안 주는 사장이 많았다. 신고를 하거나 보상을 요구할 생각도 못 했다. 그러면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그는 “나를 아껴준다고 믿으며 부모님처럼 따랐던 사장님들이 하나같이 내 노동력을 착취한 거였다. 내가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뒤늦게야 자신을 착취한 이들을 찾아가 따져 묻고 신고하기에는 이미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러버렸다. 세상을 너무도 몰랐다. 그에게 세상의 진짜 모습을 가르치거나 보여준 이도 없었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당하고 구르다 어느새 마흔이 됐다. 2018년, 그는 그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농약을 들이켰다. 삶은 생각보다 끈질기고 강했다. 몇 안 되는 친척들과도 연락을 끊고 미래고시텔로 흘러왔다. 늘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자다가 자신만의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제 그는 과거와 완벽하게 단절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끈은 남아 있다. 사회에서 얻은 상처를 매일 삼킨다. 하루 세 번, 열 알씩 털어 넣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약이다. 그래도 그는 새로운 삶을 그려가고 있다. 예전에 꽃집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플로리스트가 되려 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취업 프로그램도 마쳤다. 어두운 203호에서 꽃이 피어나려 애를 쓰고 있다.




에필로그
‘미래고시텔’의 증발자들은 분명 사회를 떠났지만, 사회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언젠가 때가 되면 돌아갈 수도 있겠죠’라는 막연한 계획도 갖고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속했던 사회로는 돌아가지 않더라도, 다른 사회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도 품고 있다.

증발자들에게 ‘사회로 복귀해 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이들에 대한 폭력일 수 있다.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들이 택한 단절은 이들에게 현재로서 최선의 안식이다. 각자의 아픔을 품은 이들이 존재의 터전을 ‘미래고시텔’로 옮겨 몸을 기댈 뿐이다.

전국에 다른 이름의 미래고시텔은 수두룩하다. 도심 한복판에서, 당신이 무심코 걸어 지나가는 길 옆에서 증발자들은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고 있다.





나락으로 내몰려… 스스로를 삭제한 사람들
우발적 가출-범죄 연루와 달라… 상처 등 쌓이며 자발적 단절 선택


실직, 파산, 사별, 이혼, 질병…. 인생이란 언제 어떤 시련이 닥쳐올지 모른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뻗지 못할 수도 있다.

남들은 실패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나의 존엄성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 벼랑 끝으로 밀려 추락하기 직전이지만 거리로 나가 구걸하며 살아가고 싶진 않다. 그럴 때 누군가는 생각한다.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여기, 정말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는 이들이 있다. 홧김에 집을 나가는 가출이 아니다. 범죄나 사고에 연루돼 숨거나 숨겨진 것도 아니다. 증발은 자발적인 의지로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이웃, 동료 등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단절하는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삭제하는 일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선 ‘증발’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이혼으로 인한 상실감을 채우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받아온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사라져버리는 이들이 있다.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 생긴 멍은 시간이 갈수록 크고 진해진다. 이들 주위에는 증발하려는 자를 돕는 이가 있는가 하면 증발한 자의 뒤를 쫓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보급률이 95%에 달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완벽히 증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에 동아일보가 3개월간 추적한 증발자와 그 가족들은 묻는다.

“당신, 정말 벼랑 끝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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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1> 세상을 등지고 증발을 택하다
https://original.donga.com/2020/lost1

동아히어로콘텐츠 / 증발 <2> 증발자들의 공간, 미래고시텔
https://original.donga.com/2020/los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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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콘텐츠팀

▽팀장: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기사 취재: 김기윤 이호재 사지원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양회성 이원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김성규 이샘물 기자
▽디지털 제작: 윤수미 이현정 김수영 윤태영 김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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