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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가 새삼 일깨워준 제대로 된 말의 힘[오늘과 내일/이승헌]

입력 | 2020-10-06 03:00:00

70대 老가수가 몇 마디 말로 보여준 통찰
청와대, 눈과 귀 입 되돌아보는 계기 되길




이승헌 정치부장

가수 나훈아의 추석 연휴 공연이 아직도 화제다. 그 가운데 나훈아의 말도 있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KBS가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나훈아의 사이다 발언에 열광했다면 그건 메시지가 분명한 데다 무엇보다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했으면 하는 말을 오랜만에 TV에 나오는 가수가 하자 ‘의외성’이 겹치면서 폭발력이 더했다. 국내외 정치인들의 말과 메시지를 좇으며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의 ‘팔 할’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는데, 다른 분야 레전드도 마찬가지일 수 있음을 이번에 절감했다.

이번 ‘나훈아 사건’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필자는 정치 리더들의 명언을 가끔 되새기곤 한다. 직업적 습관 같은 건데, 당시 상황을 담고 있어 역사책을 보는 느낌이 든다. 김구 안창호 선생 등 우리 선각자들의 말도 좋고, 미국 대통령들의 말들도 새길 게 적지 않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인 1956년 한 연설 중 일부. 이 문장을 인용했다는 단테의 ‘신곡’에는 정작 ‘지옥의 가장 뜨거운’ 등의 표현이 없어서 과다 해석 논란도 있지만 메시지만큼은 불처럼 분명하다. 대통령 시절에도 종종 사용해서 그가 구현하려던 뉴 프런티어 정신의 상징적 표현 중 하나가 됐다.

깊은 울림의 유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넘사벽’이다. 1984년 재선 도전에 나선 레이건은 당시 73세로 역대 최고령 대선 후보. 선거 내내 민주당 월터 먼데일 후보는 고령을 문제 삼았다. TV 토론에서도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레이건은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이슈화하지 않겠다”고 했다. 황당해하는 사회자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레이건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내 경쟁자의 어림과 경험 부족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먼데일은 패배를 직감한 듯 웃고 말았다. 이보다 더 고급스러운 네거티브 캠페인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와 언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따라가기 어렵다. 2017년 1월 18일, 트럼프 취임을 하루 앞두고 한 그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언론학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여러분은 나에게 거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게 된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 정부에서도) 집요하게 진실을 끄집어내서 미국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달라.”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후 많은 말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단연 취임사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대목이다. 조국, 추미애 사태와 부동산 대란을 겪으며 조소(嘲笑)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엔 새 정부 출범의 에너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후 무릎을 치게 하는 말이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의 말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비핵화를 생략하고 종전선언을 촉구한 유엔총회 연설이나, 공무원 총살 사건에도 김정은의 사과를 ‘각별하다’며 평가한 발언 등이 대표적이다.

왜 그럴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중과의 공감력이 떨어지는 게 가장 클 듯싶다. 이게 온전히 문 대통령 탓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청와대의 총체적인 공감력이 떨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는 말이 쌓여 레거시를 만드는 과정이다. 현실에 대응하는 청와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정상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