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1〉 기다림의 윤회
영화 ‘5일의 마중’에서 기억을 잃은 펑안위(왼쪽)는 남편이 바로 옆에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매월 5일이 오면 기차역에 나가 남편을 애타게 기다린다. 동아일보DB
고대에는 무소의 뿔에 양쪽 끝을 이어주는 흰 줄이 있다고 생각했다. 당나라 이상은(李商隱·812∼858)은 “우리 마음엔 무소뿔의 흰 줄처럼 통하는 것이 있다네(心有靈犀一點通·심유영서일점통)”라고 읊은 적이 있다. 이 뿔의 한쪽 끝에는 한시가 또 다른 끝에는 영화가 있다.》
이런 간절한 기다림은 중국 장이머우 감독의 ‘5일의 마중’(2014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 루옌스는 문화대혁명 와중에 우파분자로 지목돼 아내 펑완위와 생이별하게 된다. 광풍이 지나고 루옌스가 돌아오지만 펑완위는 심인성 기억장애로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 과거 수용소를 탈출해 온 남편을 돕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펑완위는 5일에 돌아온다던 루옌스를 마중하기 위해 매달 5일이 되면 역으로 나가 애타게 남편을 기다린다. 자신 옆에 루옌스가 있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억 속 남편은 끝내 오지 않는다.
원작인 옌거링의 장편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루옌스와 가족이 겪은 억압과 고통의 상처들이 사회비판적 요소들과 함께 생략돼 있다. 하지만 이 지점이 오히려 한시처럼 간절한 기다림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한시 역시 마찬가지다. ‘기다리며’의 마지막 구절 근각비(近却非)라는 표현이 어색하다거나 ‘인(人)’자가 중복 사용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작은 흠결이 그리움의 절절함을 덜어내진 못한다. 비교하자면 한시에서 세 글자로 포착된 것이 영화에선 여러 차례 반복돼 스크린에 등장할 뿐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의 시공간은 언제나 기시감 속에 반복되면서도 끝내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황지우 시인이 썼던 것처럼 미리 가 기다리는 동안 모든 발자국이 가슴에 쿵쿵거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너였다가/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 아마도 그 사람은 끝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 천수원도 퇴락했다. 이곳을 다시 기다림의 장소로 환기시킨 것도 이 시였다. 상전벽해가 되어도 기다림의 마음만은 오롯이 남아 전한다. 영화도 시도 윤회처럼 반복되는 우리 모두의 애틋한 기다림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