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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 경제[오늘과 내일/김광현]

입력 | 2020-10-08 03:00:00

남의 돈으로 자기 생색내기 후흑 정책 판쳐
뻔뻔한 포퓰리즘 정책의 대가는 국민이 치러야




김광현 논설위원

청나라 말기 이종오(李宗吾)가 정립한 후흑학(厚黑學)이란 이론이 있다. 후흑은 면후(面厚)·심흑(心黑)의 준말로 낯이 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멓다, 즉 뻔뻔스럽고 음흉하다는 뜻이다. 후흑학에 따르면 난세에는 정의나 양심보다는 후흑이 승리할 때가 많았다. 후흑은 대체로 그런 부류의 사람을 일컫지만 전략이나 정책에도 해당된다.

이런 후흑에 가까운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가 현 정부의 재정운용이고, 엊그제 정부가 발표한 재정준칙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재정준칙은 국가채무 같은 재정지표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운용하겠다는 지침이다. 핵심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 이하로, 통합재정수지는 ―3% 이내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수치도 수치지만 적용 시점이 이 정부가 끝난 한참 뒤인 2025년부터이고 갖가지 예외조항이 있는 데다 강제 규정도 없어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다. 우리도 국가재정에 대해 아예 신경을 끄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면피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재정이 악화되는 속도는 실로 심각한 수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국가채무비율이 마지노선인 40%를 넘어선 것을 두고 “나라 곳간이 바닥났다”며 박근혜 정부를 맹비난한 적이 있다. 집권 후에는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한 어떤 해명도 없이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40%의 근거가 뭐냐”며 팽창 적자예산의 길을 활짝 열었다. 여기에 코로나19가 터지자 추경에 추경을 거듭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포함해 이전의 정부들이라고 돈 쓰면 인기 얻는 줄 몰랐겠는가. 모두가 국민의 세금 혹은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빚이고, 재정건전성이 나라경제의 방파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랏빚을 내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이다. 이렇게 아껴둔 돈을 두고 “다른 나라에 비해 재정지출의 여력이 아직은 충분하다”며 펑펑 써대고는 마치 자신의 능력이고 치적인 양 생색을 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낯이 두껍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런 후흑성 퍼주기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총선 때 긴급재난지원금에서 그 효력이 충분히 검증됐고 차기 대선 주자들 가운데 현재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정치인이 스스로 포퓰리스트를 자임하는 이재명 경기지사인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해선 안 되는 줄 알지만 그걸 선택하는 비합리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비둘기에게 A레버를 쪼면 조금이지만 당장 먹이가 나오고 B레버를 쪼면 몇 초 늦게 더 많은 먹이가 나오는 실험이 있었다. 지연되는 시간과 늘어나는 먹이의 양에 따라 달라지지만 결국에는 비둘기들이 ‘나중 많이’ B레버보다 ‘당장 조금’ A레버를 선호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행동경제학과 진화생물학에서는 2억8000만 년 전에 조류와 분화한 포유류의 뇌도 크게 다르지 않고 인간의 행동도 그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포퓰리즘에 치우친 정치인일수록 새 머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비합리적인 속성을 자신을 위해 최대한 이용해 먹는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여당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던 국민의힘도 기본소득 도입을 정강정책 1호로 내세운다. 갈수록 정치무대는 누가 더 남의 돈으로 자기 생색내기를 잘하는지를 겨루는 후흑 대결의 장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그 추세를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비합리적인 선택의 쓰라린 대가는 결국 국민이 치를 것이라는 점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