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하천도론, 남북교류시대에 부활 한다
운정신도시 주산에 형성된 고인돌은 천기(天氣)가 풍성
황희와 율곡의 숨결이 밴 교육 콘텐츠
수도권 2기 신도시 10곳 중 새로 지정된 3기 신도시와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을 곳이 있다. 약 1650만㎡(500만 평) 부지에 7만8000여 채, 20만여 명의 인구를 수용하는 파주 운정신도시다. 현재 1·2지구 개발이 완료된 데 이어 마지막 3지구 공사가 한창인 운정신도시는 GTX(수도권광역급행철도)-A 노선과 서울~문산 고속도로가 건설될 예정이다. 그만큼 서울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는데다 남북 교류가 본격화되면 수도권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큰 곳이다.
고인돌 무덤군이 들어선 장명산 자락의 모습. 운정신도시 바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운정신도시는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을 대신할 천도 대상지로 검토됐던 교하(交河)가 바로 이 지역이다. 1612년 지관 이의신은 임금(광해군)에게 “국도(한양)의 기운이 쇠하였고, 교하는 길지”라며 수도 이전을 적극 주창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한양의 왕기(旺氣)가 쇠하였다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設)을 근거로 내세운 교하천도론은 당시 기득권층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무산됐다. 하지만 그때 거론됐던 왕기는 아직도 남아 있어 남북교류시대가 열리면 기운을 발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지역의 기운만 놓고 보면 제2 행정수도로 부상한 세종특별자치시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남북이 통일되면 통일수도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정도다.
● 명당을 증명하는 다양한 표식들
장명산자락의 고인돌. 천기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명당 혈(穴)에 조성돼 있다.
파주 교하가 명당 길지임을 알려주는 표식은 여럿 존재한다. 운정신도시 바로 북쪽에 있는 장명산(102m) 자락의 야트막한 능선에는 100여 기에 달하는 고인돌 무덤군과 청동기시기의 집터, 토기 등이 남아있다. 이 구릉지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고인돌 대부분은 파괴됐고 현재 20여 기만 남아 있지만 청동기 때부터 이곳이 주목받던 지역임을 보여준다.
현재 교하동 ‘고인돌 삼림욕장’으로 조성된 이 구릉지대(교화동·다율동·당하동)는 상태가 양호한 고인돌 6기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그 장소가 특별한 기운이 서려 있는 곳이다. 특히 다율리·당하리 지석묘 2·4·5호 등 고인돌들은 정확히 천기(天氣) 에너지가 하강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청동기 시절 지배계층의 돌무덤인 고인돌을 조성한 이들이 중국 한나라(BC 206~AD 9년) 이후 발전한 풍수학을 알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이들은 땅의 기운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교하지역 이외에도 한반도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대부분은 명당이라 할 만한 곳에 있다. 기 체험 힐링과 풍수 공부 차원에서 천기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는 곳으로 고인돌을 추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파주시 적성면 주월리에는 삼국시대 토성인 육계토성이 있다. 그 형태가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한강의 풍납토성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이곳을 하북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온조왕이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면서 하북의 위례성인 육계토성을 모범으로 삼아 하남의 위례성 풍납토성을 지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곳이 어느 시대의 토성이건, 파주 일대가 왕조 혹은 소국가의 도읍지로 주목받을 만큼 길지였음은 분명하다.
지형적으로 봐도 입증된다. 운정신도시는 널따란 구릉성 평지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은 남고북저형(南高北低形)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고양시 황룡산(129.7m)에서 파주출판도시가 들어선 심학산(193.5m)까지 이어지는 지맥이 형성돼 있다. 북쪽으로는 공릉천이 띠를 두르듯 흘러 서쪽의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마치 서울 강남이 남쪽의 우면산과 구룡산 등을 뒷배 삼아 북쪽으로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또 운정 신도시의 상징인 ‘운정호수공원’과 연결돼 있는 소리천은 마치 한양의 청계천처럼 내당수(內堂水;명당 터 안에서 흐르는 물)를 이뤄 공릉천으로 빠져나간다. 수도권 신도시에서 이만한 지세를 갖추고 있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말 그대로 명당 조건을 고루 갖춘 셈이다.
● 교육 콘텐츠가 풍부한 역사 도시
운정신도시가 있는 파주는 예로부터 문향(文鄕) 또는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렸다. 파주가 조선 유학자들의 우상인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고을’로 불린 데에는 방촌 황희, 율곡 이이 등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조선의 2대 학문 유파 중 하나인 기호학파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한강변 자유로를 끼고 북쪽으로 한참 가다보면 임진강이 흐르는 문산읍 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갈매기가 날아드는 정자’란 뜻의 반구정은 청백리 표상이자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무려 6명의 왕을 보필한 방촌 황희가 은거하던 곳이다. 방촌은 관직에서 물러나서 이곳에서 임진강 모래사장에 날아드는 갈매기들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반구정에는 황희 동상, 제사를 지내는 영당,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 등이 있다.
반구정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 바로 앞 임진강 건너가 장단콩으로 유명한 파주시 장단면이고, 산 너머로 멀리 개성의 송악산(가운데)이 어렴풋이 보인다.
반구정에 오르면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강 건너로는 민통선 안쪽인 파주시 장단면이다. 필자가 방문한 때는 날씨가 화창해 운 좋게도 멀리 떨어진 개성의 송악산 정상까지 볼 수 있었다. 고려 출신인 방촌은 이곳에서 송악산을 바라보면서 고려의 수도 개성시절을 추억했을지 모를 일이다. 반구정 일대는 뛰어난 명혈(名穴) 터이기도 하다. 주말을 이용해 황희의 자취가 밴 이곳에서 자녀와 함께 학문의 기운을 쐬기를 권한다.
현재 출판도시가 들어선 ‘문발리(文發里)’도 방촌과 얽혀 있다. 1452년 방촌이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한 문종은 이곳까지 찾아와 장례를 지켜봤고 궁으로 돌아갈 때 ‘황희의 높은 학덕과 지혜를 널리 알리라’는 뜻에서 문발리와 문지리(文智里)라는 두 마을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현재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출판단지가 이곳에 들어선 것도 방촌의 문덕(文德)이 지금까지 이어진 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기호학파의 거두인 율곡 이이도 파주와 인연이 매우 깊다. 율곡의 본향(本鄕)인 파주에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율곡리 마을과 그가 8세 때 시를 지은 곳으로 유명한 화석정이 있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 유학자 길재의 서원이 있던 곳이다. 율곡의 5대조가 이곳에 정자를 세웠고 율곡은 관직에서 물러날 때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전해진다. 이곳 역시 학문의 명당 터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화석정 인근에는 율곡을 배향하는 자운서원과 율곡의 가족 묘역이 함께 있는 율곡기념관이 있다. 특히 율곡의 가족묘역은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을 모신 묘 위쪽으로 그의 맏형 (이선) 부부 묘가 있고, 최상층에 율곡 부부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안내판에는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풍수적으로 보면 명당 혈지를 고르다 보니 그렇게 조성됐다고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 제일 먼저 조성된 율곡 부모 묘와 그 후에 조성된 율곡 부부 묘는 정확히 명당 혈에 들어서 있다.
화석정에서 바라다본 임진강변의 모습. 파주 임진강 8경 중 하나다.
필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 마침 율곡 묘에서 한 부자가 참배하고 있었다. 율곡의 뛰어난 점을 본받으려는 아버지와 아들의 기도 모습에서 파주가 학문의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주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한 문향이고, 이런 역사성은 땅의 기운에서도 읽혀진다. 파주를 대표하는 운정신도시에서도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기를 기대해본다.
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