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사이언스-국어문화원연합회… 생명과학 용어 개선 설문조사
“뼈모세포는 한글인 ‘뼈’와 한자인 ‘모(母)’가 합쳐진 국적 불명의 단어입니다. 뼈생성세포로 부르는 게 더 적합합니다.”
일반인들에게 과학 자체만큼이나 과학 용어도 생소하고 어렵다. 동아사이언스와 국어문화원연합회는 이달 9일 한글날을 맞아 쉬운 의과학용어 찾아 쓰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생명과학 용어 가운데 개선이 시급한 사례를 조사했다. 지난달 23일부터 28일까지 포스텍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 회원 1193명이 참여한 온라인 설문을 진행했다. 브릭은 생명과학자와 의학자들로 이뤄진 국내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로 2005년 황우석 사태 폭로의 진원지로도 유명하다.
○‘게놈’보단 ‘유전체’가 적절
생명과학자들은 과학 서적이나 미디어에서 흔히 접하는 용어인 ‘게놈’을 가장 시급히 바꿔야 할 단어로 지목했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뜻하는 영어단어 두 개를 합친 말이다. 영어 발음으론 ‘지놈’으로 읽어야 하지만 소개 과정에서 ‘게놈’으로 잘못 굳어졌다.
1990년 미국국립보건원(NIH)을 중심으로 과학자들은 인간의 DNA에 있는 30억 개에 이르는 염기쌍을 모두 읽어 유전자 지도를 그리는 ‘휴먼지놈프로젝트(HGP)’에 착수했다. 인체를 세포보다 작은 DNA 수준에서 분석하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생명과학 연구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내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유전자 지도작성계획(인간게놈사업)’ ‘인간게놈프로젝트’ 등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생명과학자들은 게놈보다는 영어 발음을 살려 ‘지놈’으로 표기하거나, 그보다는 이해하기 쉽게 ‘유전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 응답자는 “게놈은 독일(Germany)을 ‘저머니’가 아니라 ‘게르마니’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며 “게놈 대신 우리말인 유전체를 사용하자”고 했다.
○‘아밀라아제’는 일본식 표기 잔재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영어식으로 아밀레이스와 라이페이스로 바꿔 쓰고 있다. 하지만 식품과 환경 분야 등 일부 응용 분야의 학계에선 옛 발음을 따르고 있어 과학기술계 내에서도 용어가 통일되지 않아 혼선을 주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는 “원소를 포함해 과학 용어는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인 만큼 통일된 단어를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편견 낳는 ‘우성-열성’ 표현
비유나 번역 과정에서 오해를 낳는 단어도 있다. 가령 유전자에서 특정 염기를 잘라내고 원하는 유전자로 교체하는 기술은 흔히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데, 이 때문에 실제로 유전자를 자르는 가위가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우성과 열성은 유전자의 특징이 겉으로 잘 드러나는지, 감춰질 수 있는지를 표시하는데 우성은 우수하고 열성은 열등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한 응답자는 “일본 유전학계는 우성과 열성 대신 각각 현성(顯性·잡종 제1대에서 반드시 겉으로 나타나는 형질)과 잠성(潛性·잡종 제1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형질)으로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외부 자극에 신체 기관이 반응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학술 용어인 ‘센서티비티(sensitivity)’가 ‘감수성’으로 직역돼 감상적인 단어로 뜻이 잘못 전달되기도 한다. 인슐린에 대한 체내 반응이 정상보다 떨어지는 경우를 나타내는 ‘인슐린 저항성’도 인슐린이 스스로 저항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또 인체 면역세포의 한 종류인 T살해세포(killer cell)도 T세포를 죽인다는 뜻으로 오해받기 쉬운 만큼 ‘세포독성 T세포’나 ‘킬러 T세포’로 쓰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어려운 단어는 쉽게 풀어 써야
응답자들은 지나치게 어려운 용어를 풀어 쓰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많이 등장하는 PCR의 경우 영어를 직역해 ‘중합효소연쇄반응’이라고 표기하는데, ‘유전자 증폭’처럼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바꾸자는 것이다.
감염 환자 한 명이 감염시키는 사람 수를 뜻하는 재생산지수(reproduction number)도 ‘전파지수’로 바꾼다거나, ‘사이토카인 폭풍’ 대신 ‘염증물질 과다활성’으로 표기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 교수는 “세계적으로 ‘코비드(COVID)-19’라고 부르는데 한국에서만 ‘코로나19’라고 한다”며 “용어를 새롭게 정할 때는 미래 세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해 국제적인 흐름을 따를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현경 uneasy75@donga.com·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