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복합 화재 몸 던져 대피 도와 이웃들 “2802호 가족덕에 살았죠”
8일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 화재 당시 28층에서 이웃 주민들의 대피를 도운 2802호 가족(왼쪽부터 아내 장현숙 씨, 남편 구창식 씨, 아들 모선 씨)이 11일 임시로 마련된 숙소 로비에 모여 앉아 있다. 오른쪽 사진은 구 씨가 구조 당시 사용한 사다리. 구 씨는 허리 높이의 난간 봉을 발로 부순 뒤(실선) 임신부와 갓난아이 등 가족 4명을 구했다. 울산=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구모선 씨 제공
8일 밤 대형 화재가 발생한 울산 남구의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 안. 2802호 주민 구창식 씨(51)는 같은 층에 있는 피난처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족들과 급히 집을 빠져나왔지만 남아있는 이웃들은 없는지 걱정하던 찰나. 위층에서 날카로운 구조 요청이 들려왔다.
위를 올려다보니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29층 테라스에서 갓난아이를 안은 여성이 울부짖고 있었다. 여성도 배가 부른 임신부. 혼자서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다. 구 씨는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곧장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수십 번 발길질로 베란다 난간 봉을 부순 뒤 아기와 임신부를 포함해 4명을 28층으로 대피시켰다.
도움을 받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구 씨 가족은 여러 가족의 구출에 애를 쏟았다. 구 씨와 아들 모선 씨(25), 부인 장현숙 씨(50)는 이날 최소 18명을 구하는 데 크고 작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옆집 주민 김모 씨(53)는 “갑자기 집으로 연기가 들어와 어쩔 줄 몰라 넋을 놓았다. 그때 장 씨가 안방 창문을 두드리며 ‘이쪽으로 나오라’고 해서 살았다”고 했다.
임신부 가족을 구했던 구 씨는 곧장 30층 가족도 구했다. 빠져나갈 길이 막힌 이들을 28층으로 뛰어내리게 해서 직접 받아냈다. 일반 아파트와 달리 주상복합이라 30층 바깥이 28층 야외테라스로 연결돼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무려 6m 높이로 쉽지 않은 모험이었다. 구 씨는 “맨몸으로 아이 한 명을 받은 뒤 아들과 이불을 펼쳐들고 나머지 3명을 받아냈다”며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전했다.
▼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유리 파편에 발바닥 찢긴 줄도 몰라” ▼
18명 구조한 ‘울산 가족’
사다리 타고 올라가 탈출 돕고 창문 두드리며 “여기로 나오라”
3시간 구조 돕다 탈진해 응급실로
“덕분에 살았다” 이웃 인사에 뿌듯
“가족 3명이 작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걸 멀리서 봤어요. 정신이 없다 보니 무작정 뛰어내리려고 하기에 ‘거기서 뛰면 죽는다. 구조대가 가니 기다리라’고 목을 놓아 소리를 질렀어요. 아내가 ‘현관 비밀번호가 뭐냐’고 물어봐서 소방대 쪽에 알려줬죠.”
11일 임시 숙소에서 만난 구 씨 가족은 주위의 칭찬과 감사에 겸연쩍어했다. 구 씨는 “불이 난 뒤 살려달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니 사람부터 구하고 봐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다”며 쑥스러워했다. 여전히 목이 쉰 구 씨는 180cm가 넘는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그날 일을 겪은 뒤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구한 뒤 1층에 내려와서는 탈진 증상이 와서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지상에 내려와 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불이 나고 3시간이 훌쩍 지나간 상태였어요. 하도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거죠. 여기저기 부딪치고 깨지는 바람에 그제야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다는 걸 알았죠.”
상처가 가득한 건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선 씨의 두 발은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급하게 맨발로 나와서 27층에 현재 상황 등을 알리느라 유리 파편이 가득한 바닥을 밟고 다닌 탓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아이들이 먼저”라며 이불을 찢어 이웃집 어린이들의 발을 감싸줬다고 한다. 모선 씨는 “그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별로 아픈 줄도 몰랐다”며 “내려오고 나니 통증이 몰려왔다. 어제까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며 웃었다.
구 씨 가족이 구한 3301호 주민들은 11일 밤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꼭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며 장 씨의 손을 꼭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장 씨는 “그때 그분들이 불에 타 죽느니 뛰어내려서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를 보고 힘을 얻어 살았다며 고마워하셨다. 서로 돕는 게 당연한 건데 찾아와서 인사까지 하셔서 몸 둘 바를 몰랐다”고 말했다.
구 씨 가족은 10일 화재를 당한 2802호 집에 다녀왔다. 짐작은 했지만, 소중한 집은 완전히 타버려 형체가 남아있는 게 거의 없었다. 건질 만한 물건 역시 남질 않았다. 구 씨는 “솔직히 소중한 것 몇 개는 챙기고 싶은 마음이 순간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당연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이웃들을 구했기에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울산=김태성 kts5710@donga.com·조응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