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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알려준 ‘리더의 길’[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39〉

입력 | 2020-10-16 03:00:00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입항했다. 당직사관을 남겨두고 선원들은 상륙했다. 그렇지만 그 좋다는 로테르담에 왔으면 시내 구경을 한번 하는 것이 선원들의 권리이자 행복 그 자체이다. 하역 담당 총책임자라서 망설이는 1등 항해사에게 3등 항해사였던 나는 “1항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직 근무를 잘 서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당직을 서던 나는 긴급보고를 받았다.

선박과 부두를 이어주는 갱웨이가 망가졌다. 고조(高潮)가 되자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져서 선박과 부두의 편차가 줄어들자 이보다 길게 설치되어 있던 갱웨이가 그만 쪼그라든 것이다. 현장에서 갱웨이의 길이를 줄이면 될 일이었는데 당직선원이 실수한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한 내가 1등 항해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선박에서 부선장 격인 1등 항해사의 역할은 규율부장이다. 선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규율을 만들어 집행해야 한다. 일정한 규율이 없으면 선원들이 밤새 게임을 하기 때문에 다음 날 업무에도 지장이 있다. 그래서 보통 오후 10시까지만 게임을 할 수 있다.

평소 게임 구경만 하던 내가 어느 날 게임에 들어갔다. 시간은 10시가 되었다. 그만두어야 하는데 규율반장이었던 내가 오락 시간을 연장한다고 선언하면서 게임을 더 했다. 11시까지 하고 그만두기는 했지만, 다음 날 나는 내가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선내 규율을 깨뜨린 것을 깨달았다. 1등 항해사가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집행하겠다고 공고한 것을 깨뜨린 것이다. 나의 명령을 스스로 허언으로 만든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일을 나는 아직도 큰 교훈으로 삼는다.

태평양을 건너올 때였다. 태풍을 만날 때 바람이나 파도에 이기려고 대들면 안 된다. 뒷바람을 받으면서 항해하다가 바람이 잦아들고 이어서 파도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대자연 앞에서 인내를 배우는 것이다. 뒷바람을 맞으면서 항해하다 보니, 진행 방향은 오히려 미국 쪽이 되어버렸다. 이 배의 방향을 언제 일본으로 돌릴지가 큰 관심사였다. 함부로 뱃머리를 돌리다가 횡파를 만나면 선박이 전복할 위험이 있다. 다시 파도를 맞이하기 전에 선박이 180도 돌아야 되는 모험을 해야 한다.

나는 초시계를 활용했다. 파의 주기가 30초 이상이 된다. 선장에게 배를 서쪽으로 돌려도 되겠다고 보고했다. 선장이 “그러면 어디 배를 돌려 봐” 하고 허락했다. 나는 깊은 숨을 쉬었다. 그리고 “타, 왼쪽으로 30도”를 명했다. 동시에 나는 쌍안경으로 파도의 방향을 주시했다. 60도 정도 돌아갔나 싶을 때 선장이 “3항사 안되겠다. 타 제자리로 하라”고 다급한 명령을 내렸다. 경험 많은 선장이 큰 횡파를 맞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길고 높은 파도가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아찔했다. 선박을 얼른 제자리로 돌렸다. 하루 뒤 파도가 더 잔잔해졌을 때 안전하게 배를 180도 돌려 일본으로 향했다. “이제 배를 서향으로 해도 되겠다”고 한 말이 허언이 되고 말았다. 허언이 되어버린 일들을 복기하여 반성하면서 나는 리더십의 상징인 선장직을 향해 나아갔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