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발걸음/리베카 솔닛 지음·김정아 옮김/468쪽·1만9000원·반비
아일랜드 골웨이만 남서쪽으로 넓게 펼쳐진 석회암 지역 버런은 유명한 관광지다. 삶의 터전에서 이국적 여행지로 변한 이곳에서 저자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클리셰를 남발하기보다 그것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한다. ⓒBurren and Cliffs of Mother UNESCO Global Geopark
솔닛은 과거의 죽은 기록인 줄 알았던 역사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매료된다. 아일랜드를 여행 중인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칠 걸인의 모습에서 역사와 기억에 관한 사유를 펼쳐나간다.
이 책은 솔닛이 26세이던 1987년, 족보를 연구하던 삼촌 덕분에 아일랜드 여권을 받게 되면서 떠난 여행으로 시작됐다. 한 달간 대부분을 걸어서 아일랜드를 누빈 그는 풍부한 조사와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길에서 혹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떠올린 단상을 적어둔다. 1997년 출간된 이 책은 4년 뒤 솔닛에게 명성을 안겨준 ‘걷기의 인문학’으로 발전됐다.
절정에 달하는 건 켄메어 환상열석(還狀列石)을 마주할 때다. 온갖 거창함과 장식이 사라진 벌거벗은 풍경 앞에서 그는 내면의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혈통이라는 것이 믿으면 만들어지는 ‘신앙 고백’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몸 하나만 남은 존재’가 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의 온전함을 이야기한다.
책의 막바지에서 그는 아일랜드의 ‘트래블러’를 이야기한다. 유럽의 집시처럼 아일랜드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트래블러를 통해 유럽과 영국의 비주류로 간주된 아일랜드에서조차 차별받는 존재들이 있음을 말한다. 관광객을 위한 여행책자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틈바구니를 파헤치는 과정은, 지역을 속속들이 체득하는 여행의 지적 흥미를 일깨워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