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우울증 환자 100만명 시대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B 씨(53)는 최근 정신과 의원을 찾았다. 그 역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우울감이 점점 심해지면서 불면증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B 씨는 최근 몇 달간 장사가 잘되지 않아 대출금 갚을 걱정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생 자녀 2명을 둔 30대 여성 C 씨는 양육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이어진 사례다.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아이들에게 모진 말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시간이 지나 자책하는 일이 반복됐다. C 씨도 한 달 전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 ‘우울 위험군’ 비율 갈수록 높아져
우울증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16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원이 의원 (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의료기관을 찾아 우울증 진료를 받은 환자는 59만2951명. 지난해 전체(79만8427명)의 4분의 3가량에 해당한다. 2015년 60만4418명이던 우울증 진료 환자는 해마다 3만∼7만 명가량 늘었는데 올해는 증가 폭이 훨씬 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우울감을 겪는 이른바 ‘코로나 블루’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상반기 수치를 감안하면 올 한 해 우울증 환자는 100만 명을 넘길 가능성이 높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우울증 진료 환자 통계에는 반영되지 않는 ‘우울 관련 심리상담자’ 수도 크게 늘었다. 복지부에 따르면 우울감 때문에 올 상반기 전국 지방자치단체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사례는 모두 73만1546건이다. 지난해 상반기엔 36만2840건, 하반기엔 35만582건이었다. 올 상반기 6개월 동안의 상담 건수가 지난해 전체보다 많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난정신건강위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코로나19 감염 우려 때문에 병원을 찾는 게 꺼려질 수 있는데도 우울증 치료를 위해 내원하는 환자는 계속 늘고 있다”고 했다. 환자가 늘면서 우울증 진료비 총액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16년 3036억 원이던 우울증 진료비가 지난해엔 4413억 원으로 3년 새 45%가 늘었다.
○ 20대, 경제 자립 막히며 우울감 커져
24세 남성 D 씨는 올 8월 정신과 의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마땅한 직업이 없는 그는 평소 불안감을 종종 호소해 왔다고 한다. 다른 20대 남성 E 씨도 올 3월 정신과 의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지난해 대기업에 취업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잘 지냈는데 어느 날부터 직장 내 갈등을 겪게 되면서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올 6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20대에서 우울증이 증가하는 건 이들이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박선영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우울증은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린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며 “젊은층 입장에서는 그동안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왔는데 막상 사회로 나갈 때가 되니 능력을 펼치거나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는 상황이 이어져 만성적인 우울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 코로나19가 스트레스 키워
올 들어 우울증 환자가 급증한 데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전국의 20∼65세 남녀 1031명을 온라인으로 설문조사해 14일 발표한 결과 응답자의 40.7%가 ‘코로나 블루’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앞서 올 4월 경기연구원이 전국 17개 시도에 거주하는 15세 이상 1500명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47.5%가 코로나19로 인해 ‘다소’ 또는 ‘심각’ 수준의 불안이나 우울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이 코로나19로 겪는 스트레스지수(5점 만점)가 평균 3.7점으로 나왔는데 세월호 참사(3.3점)보다 높았다.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2001년)와 동일본대지진(2011년) 이후에도 해당 도시와 국가에서 우울증 환자가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분노 감정을 의미하는 이른바 ‘코로나 레드’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일상생활의 제약이나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분노 감정을 표출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 분노조절 장애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1389명이다. 지난해 전체(2249명)의 61.8%에 해당하는 수치다.
○ 맞춤형 심리 지원 필요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남길 심리적 후유증에 대한 대처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현수 서울시 코로나19 심리지원단장(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럽 등에서는 록다운(봉쇄) 조치에 따른 고립 생활로 외로움을 겪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도 있다”며 “이 사태가 남길 후유증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8월 ‘코로나 우울 극복을 위한 심리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심리상담 핫라인(1577-0199)과 카카오톡 챗봇 등을 통해 대상별, 단계별 상담과 심리 지원 체계를 운영한다는 내용이다. 지난달에는 심리상담 인력 확충 계획도 발표했다. 내년부터 시행될 정신건강 복지 기본계획(2021∼2025년)에 코로나 블루와 관련한 대책을 포함하기 위해 별도의 회의체도 만들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김수현 인턴기자 고려대 사학과 4학년 / 전남혁 인턴기자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