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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쉼터’ 윗세오름대피소, 등산객에게 ‘생명의 쉼터’로

입력 | 2020-10-19 03:00:00

‘인문학으로 본 한라산’ <9>




한라산국립공원 어리목, 영실, 돈내코 탐방로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는 윗세오름대피소는 등산객과 전문 산악인들의 땀과 추억이 배어 ‘있는 장소다. 통나무로 지어진 제1대피소는 붕괴 우려로 인해 사용이 금지됐으며 내년 새로 운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질 예정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17일 오전 한라산국립공원 영실탐방로 계곡과 병풍바위 주변은 단풍나무, 서어나무 등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어 빨갛고 노랗게 물들었다. 회백색의 구상나무 고사목과 갈색 산철쭉은 계곡을 따라 남하하는 단풍의 물결과 잘 어울렸다.

해발 1700m 윗세오름대피소 주변 야외 쉼터에는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하거나 간식을 먹었다. 대피소 북쪽으로는 백록담 분화구의 암벽이 웅장하게 다가왔다. 조면암질의 암벽은 풍화작용 등으로 깊게 파인 특이한 경관을 보여줬다.

윗세오름대피소는 어리목, 영실, 돈내코 등 3개 탐방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는 한라산 핵심 장소 가운데 하나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나 칼날처럼 살을 에는 겨울철 북서풍을 피하기 위한 장소로 등산객에게 ‘생명의 쉼터’다. 훈련을 하는 전문 산악인들에게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윗세오름대피소 명칭은 3개 오름(작은 화산체)이 연이어 붙어 있는 윗세오름에서 따왔는데 2개 대피소 건물과 화장실이 있다.

● 땀과 추억의 쉼터


통나무로 만들어진 윗세오름 제1대피소는 오래된 탓에 붕괴 우려가 있어 현재 출입이 금지돼 있다. 건물을 모두 헐어낸 뒤 반(半)지하 형식의 대피소로 지을 예정이다. 대피소 지상은 쉼터로 조성된다.

제2대피소는 휴게소 역할을 겸하면서 ‘한라산 특식’으로 소문난 컵라면을 비롯해 초콜릿, 식수, 비옷 등 산행에 필요한 물품을 팔았다. 휴게소를 운영했던 한라산국립공원후생복지회가 2018년 해체되면서 윗세오름대피소뿐 아니라 진달래밭대피소, 어리목대피소에서 물품 판매가 중단됐다.

대피소는 당시 문화재청 소유의 국유재산으로 수익 사업이 불가능했는데도 국유재산법을 어기고 1990년부터 영업을 한 것으로 드러나 시정 조치된 것. 이후 윗세오름휴게소는 제2대피소로, 물품을 판매한 공간은 긴급 의료구호소로 각각 바뀌었다.

윗세오름에 대피소 건물이 지어진 것은 1974년이다. 관음사 탐방코스의 용진각대피소, 성판악탐방코스의 진달래밭대피소와 함께 만들어졌다. 이들 대피소 건물은 수차례 보수되고 개축됐다. 한라산 고지대는 시베리아 벌판과 같은 기후 조건을 보이기 때문에 웬만한 시설물이 남아나질 못한다. 태풍이 덮칠 때는 순간 최대 초속 50m를 넘나드는 바람이 몰아치고, 하루에 600mm에 이르는 장대비가 쏟아지기도 한다. 겨울철 5∼10m가량 쌓이는 눈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들다. 건물이 갈라진 틈에 있던 물기가 얼 때는 틈이 더욱 벌어지면서 노후를 앞당긴다.

2007년 태풍 ‘나리’가 제주를 강타하면서 해발 1560m 탐라계곡에 있던 용진각대피소가 폭우에 휩쓸려 무너졌다.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1948∼1979)을 비롯해 국내 산악인들의 땀과 추억이 서려 있는 용진각대피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는 용진각대피소 대신 계곡 위쪽 삼각봉 앞에 삼각봉대피소를 2009년 완공했다. 삼각봉대피소는 겨울철 결로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 등 문제가 생겨 최근에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 다양하게 변모하는 대피소



영실계곡에는 조선시대 관료들의 산행 쉼터 역할을 한 사찰인 존자암이 있었다. 한라산에 대피소 형태의 건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7년 팔각형 정자 모습의 ‘탐승정’이다. 제주시 관음사 주변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해 백록담 분화구에 ‘제승정’, 용진각계곡에 ‘용진각’, 탐승정 주변에 ‘영주장’, 돈내코탐방코스에 ‘남성대’, 영실탐방코스에 ‘입승정’ 등의 건물이 세워졌다. 경찰에서 건립한 뒤 교육 당국에 운영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간이건물 형태로 지어진 이들 대피소는 태풍과 폭설 등으로 1959년 대부분 허물어지면서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대피소 개념의 건물은 1970년 탐라계곡에 세워졌다.

1988년 한라산 곳곳에 세워졌던 대피소에 대해 정비 사업이 이뤄졌다. 2002∼2003년에는 어리목산장, 한밝천대피소, 영실관리사무소, 사라오름대피소 등이 철거됐다. 현재는 어리목, 윗세, 속밭, 진달래밭, 삼각봉, 평궤 등 6개 대피소가 있으며 관리사무소는 5개 동이다.

현재 한라산국립공원지역 대피소에서는 지리산국립공원, 설악산국립공원 대피소와 달리 숙박을 할 수 없다. 하지만 1970년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한라산 숙박, 야영이 가능했다. 심지어 백록담 분화구에서 야영을 하기도 했다. 취사·야영 금지는 단계적으로 이뤄졌다. 1978년 백록담 분화구 내, 1985년 백록담 정상 지역, 1988년 한라산국립공원 전 지역으로 확대됐다. 지금은 1995년 조성한 관음사 야영장에서만 취사 및 숙박이 가능하고 겨울철 산악훈련 기간에 한해 한시적으로 용진각계곡 일대에서 야영을 허용하고 있다.

● 자연친화 대피소로 조성


국내에서 산악지대에 대피소가 처음 설치된 것은 1924년 북한산 ‘백운산장’으로 알려졌다. 백운대와 인수봉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백운산장은 작은 오두막으로 시작해 3대에 걸쳐 운영되다가 지난해 12월 영업을 종료했다. 화재가 난 뒤 20년 동안 국유지 무상 사용 조건으로 1998년 건물을 신축해서 사용하다가 기간이 만료된 것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은 건물을 리모델링해 산악전시관, 구조대 사무실 등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국립공원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산속의 별장’을 뜻하는 ‘산장’ 용어도 대피소로 변경됐는데 민간인이 음식이나 물품을 판매하는 휴게소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 제주도가 관광을 활성화한다며 한라산 탐방로 입구에 민간인이 휴게소를 짓도록 허가해 주고 운영을 보장해 준 것이 화근이다.

1978년 들어선 성판악휴게소는 5년마다 계약 갱신을 하면서 매점과 식당, 토산품 판매장을 운영했으며 그동안 3차례 주인이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판결 등에 따라 성판악휴게소는 내년에 철거될 예정이다. 영실과 1100고지 등 2곳의 휴게소는 2029년까지 무상 사용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977년 팔각정 형태로 지어진 민간인 소유 영실휴게소 건물을 철거해서 제주도가 인근에 휴게소를 신축하는 대신 20년 무상 사용을 약속한 것이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고지대, 기상조건 등의 특성 때문에 대피소를 비롯해 통제소, 화장실 등을 신축하거나 유지, 관리하기가 상당히 힘들다”며 “견고함이 우선이지만 무엇보다도 한라산 자연환경에 맞는 형태와 재질을 중요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