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광해군은 모문룡을 설득해 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로 들여보냈다. 이때부터 모문룡은 조선에 골치 아픈 존재가 되었다. 모문룡은 요동에서 100만의 난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우고, 명과 협력해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가끔 군대를 끌고 압록강을 건너 후금을 치는 시늉도 했다.
처음에는 광해군이나 인조 모두 모문룡의 군사력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모문룡을 만나고 온 관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군대라기보다는 난민, 오합지졸 무리였다. 더 괴로운 건 조선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였다. ‘군량을 달라’ ‘무역을 해 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병사를 내보내 민간지역을 약탈했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에는 노골적으로 조선 영토를 탐내고, 폭력, 약탈 행위도 늘어갔다.
모문룡의 인격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런 반성을 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왜 모문룡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을까? 그의 군대가 지닌 잠재력은 왜 포착하지 못했을까? 왜 그로 인해 후금의 침공까지 당하면서 늘 손해 보는 거래만 했을까? 국제 관계에서 상대의 인격에 의존한다면 그건 정상적인 태도일까? 답은 이렇다. 세상을 선악 구도로만 보고, 국제 정세에 무지하고, 국내 정치의 이해관계만 따지고, 실무는 모르고 이념에만 집착하는 관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