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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뒷맛 씁쓸한 ‘예형 설전’

입력 | 2020-10-21 03:00:00


“조조는 별로 대단한 인물이 못 된다. 순욱은 풍채가 좋지만 초상집에 조문용으로나 쓸 만한 얼굴이고, 조융은 기껏해야 주방을 감독하게 하여 손님을 접대할 때 필요한 요리사 수준이다.”

중국 후한 말 실존 인물로 알려진 예형(173∼198)의 말입니다. 예형은 두뇌가 명석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나 성향이 거칠고 뻣뻣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독설과 오만함으로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합니다.

예형은 당대 최고 권력자인 승상 조조 앞에서도 날카로웠습니다. 조조는 예형이 괘씸했으나 직접 칼을 꺼내지 않고 형주를 다스리는 유표에게 사절로 보냅니다. 유표는 처음에 예형의 재능을 높이 여겨 정중히 대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돌직구에 부담을 느끼고 강하(지금의 우한 일대) 태수 황조에게 보냅니다. 예형은 결국 자신의 독설에 모욕감을 느낀 황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후한서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예형이란 인물이 최근 느닷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현대판 예형으로 거론된 이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사진)입니다. 진 씨는 날카로운 시사 비평으로 유명합니다. 박진영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은 13일 “진중권 씨의 조롱이 도를 넘어서 이제는 광기에 이른 듯합니다”라며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라”고 논평했습니다.

이에 앞서 진중권 씨는 조정래 작가가 “토착 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되어버립니다. 민족반역자가 됩니다”라고 발언한 것을 비판했습니다. 진 씨는 “일본에서 유학한 문재인 대통령의 따님도 민족반역자로 처단 당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조 작가는 발화자의 의도를 왜곡했다며 진 씨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민주당 박진영 부대변인은 조 작가를 비판한 진 씨를 예형에 빗댔습니다. 작가 조정래 씨와 논객 진중권 씨 사이에 벌어진 설전에 집권 여당이 끼어든 모양새로 매우 이례적입니다. 박 부대변인은 “맥락을 읽지 않고 말 한마디를 드러내 조롱함으로써 존재감을 인정받는 전략은 진 씨의 삶의 방식”이라며 “이론도 없고 소신도 없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예의마저 없다”며 날을 세웠습니다.

진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조정래를 비판했는데, 왜 성명이 민주당에서 나오는 거냐. 당신들 일 아니니까 신경 끄라”고 응수했습니다. 설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박 부대변인은 17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변희재 씨에게 깝죽대다가 벌금 300만 원 받은 것도 부패다”라며 ‘청와대의 부패한 인사들’을 공격한 진 씨에게 날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진 씨는 “JYP가 왜 나를? 봤더니 얼굴이 달라요”라며 “자연인 박진영에겐 관심 없고, 대변인으로 논평을 내면 그럼 놀아줄게”라고 대응했습니다.

박 부대변인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독설 전문 연예인으로 돈을 버는 건가”라며 “공부가 자신 없는 얼치기 지식인의 밥 먹고 사는 방식이라 생각하니 측은하다”라는 말을 날렸습니다.

예형까지 끌어들인 이번 설전은 흥미로울는지 몰라도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감정에 치우쳐 민낯을 드러냈습니다. 공론의 장에 수준 높은 비평이 넘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조롱과 비난으로 얼룩진 담론은 독자를 피곤하게 합니다. 풍자가 깃든 촌철살인을 기대해 봅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