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차법 졸속 시행에 집 없는 설움 가중
국민 일상 챙기는 게 정부 일… “바꿔라”

허진석 산업2부장
서울 마포구에 전세 사는 홍남기 부총리도 속은 그럴듯하다. 집주인이 들어오겠다고 해서 집을 내줘야 한다. 그런데 8월 초에 매도 계약을 한 경기 의왕시 아파트는 세입자가 2년 더 살겠다고 하면서 매수자가 입주를 못 하고 있다. 매수자는 입주해야 받을 수 있는 대출을 못 받았고, 홍 부총리는 잔금을 받지 못했다.
부동산 정책의 엉성함을 방증하는 사례로 홍 부총리 사연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더 찬찬히 그 관계인들의 사정까지 유추해 보면 섣부른 정책이 국민 살림살이를 얼마나 고단하게 만드는지 더 잘 드러난다.
우리 중 누군가가 의왕 아파트 세입자라면 또 어떨까. 집주인이 집을 팔겠다고 해서 다른 집을 알아보겠다고 말했다가 막상 전셋값을 알아보니 너무 올라 이사를 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2년을 그냥 더 살겠다고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했다고 치자. 만약 세입자가 처음에는 이사를 나가겠다고 해서 집주인이 매매계약을 체결했다면 국토교통부 설명에 따르면 세입자는 집을 내줘야 할 공산이 크다. 물론 의사 표시를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가 관건인데, 이런 세세한 상황을 따져보려면 당사자 간에 다툼이 생기고, 분쟁조정위원회와 재판정까지 가야 할 수 있다. 어설픈 제도 시행 때문에 2년은 더 살면서도 마음고생에 시달리는 거다.
정부가 의도한 대로 많은 세입자는 별 탈 없이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해 2년을 적은 전세금만 올려주고 더 살게 됐다. 그렇지만 이들도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국회 연설에서 예견했듯이 2년 뒤에는 꼼짝없이 새 집을 알아봐야 한다. 결국 자신이 살고 싶은 지역에 집을 가진 사람 말고는 누구나 전세금 폭탄을 맞는 것이다.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순서대로 울화통이 터지는 시기만 다를 뿐이다.
이사철을 맞은 요즘 ‘멀쩡히 있던 전세금을 왜 건드려서, 생고생을 하게 만드냐’란 한탄이 자주 들린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투기과열지구에서 대출을 받을 때 실거주를 해야 한다는 규제가 없었다면 홍 부총리는 잔금을 받았을 것이다. 집주인이 실거주를 하겠다고 해야 세입자를 내보낼 수 있는 제도가 생기지 않았다면 홍 부총리는 같은 집에서 전세를 더 살았을 수 있다. 그때그때 쏟아져 나온 정책들이 꼬이면서 ‘마포구 홍남기 씨’ 사례가 만들어졌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하는 일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한 가정에서 가족들 불편한 것 없나 살피는 일이나 시골 마을 이장이 주민들 불편 없게 소소한 일들 미리 챙기는 것과 본질이 같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