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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쪽 감사보고서가 울린 경종[현장에서/구특교]

입력 | 2020-10-23 03:00:00


2018년 6월 조기 폐쇄가 결정된 경북 경주시 월성원자력발전소1호기전경. 동아일보DB

구특교 경제부 기자

“과거 국가 에너지 정책이 석탄에서 액화천연가스(LNG)로 전환된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감사원이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가 조작됐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한 20일, 감사 대상이던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산업화·근대화를 이끈 석탄산업을 과감히 포기한 덕에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기후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대통령 국정과제인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설명을 했지만 에너지 정책이 국가의 앞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감사원 감사 결과는 국가 백년대계인 에너지 정책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지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당초 한국수력원자력은 월성 1호기가 조기 폐쇄로 결정 나더라도 최종 폐쇄 허가가 나기까지 2년 반 정도 계속 가동을 희망했고, 산업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방침은 문재인 대통령의 한마디로 180도 달라졌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18년 4월 3일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은 “월성 1호기 폐쇄는 언제 결정할 계획이냐”는 대통령의 발언을 전해 듣는다. 백 전 장관은 곧장 실무진에게 “조기 폐쇄 결정과 동시에 즉시 가동 중단을 재검토하라”고 질책했다. 이튿날 산업부 과장은 한수원 직원을 호출해 장관의 뜻을 전달했다.

4월 10일부터 진행된 경제성 평가는 이른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였다. 산업부와 한수원, 회계법인은 판매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2018년 5월 3일 4327억 원으로 봤던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을 같은 달 18일 164억 원까지 떨어뜨렸다. 회계법인 관계자가 “한수원과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맞추기 위한 작업이 돼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감사가 진행되자 산업부 직원은 일요일 새벽에 몰래 사무실을 찾아 PC에 저장된 관련 문건 444개를 삭제했다. 증거를 인멸해 감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한 것이다.

이처럼 원전 정책의 결정은 공론화 과정도 없이 대통령 의중에 맞춰 선회했으며 경제성 평가는 조작됐고 그 증거는 삭제됐다. 그럼에도 산업부, 한수원 등 감사 대상자들은 정부의 국정과제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고 했지만 196쪽 분량의 감사원 감사 보고서에선 에너지 정책이 결정되는 단계 어디에서도 과정의 공정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원전 정책은 국가 에너지 정책의 근간이 되는 만큼 국민적 합의가 선결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에너지 정책 결정의 길목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지금과 같은 왜곡과 조작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금이라도 탈원전 정책에 투명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모호한 결론을 냈지만 이번 감사원의 감사는 정부의 독주에 작은 경고를 울렸다.

구특교 경제부 기자 koot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