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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온지 1년만에 유언장 썼던 탈북 여의사 “이젠 법학박사가 목표”[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0-10-23 14:00:00


김지은 씨가 2017년 봄 서울에 한의병원을 개업한 뒤 자신의 명패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지은 씨 제공



1990년대 중반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기근이 휩쓸었다. 거리에 바싹 마른 시체들이 방치됐다. 병원 침대에선 영양실조로 실려 온 아이들의 눈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의사들이 할 일은 없었다.

함경북도 청진 시 중심부 포항구역의 한 병원 소아과 의사였던 김지은 씨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괴로움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병원에는 포도당, 링거가 한 방울도 없었다.

“퇴근하면서 병상을 돌아봤어요. 내일 여기 누워있는 아이들 중 누가 남아있을까. 퇴근할 때마다 뒤통수에 희망과 기대의 눈빛이 꽂혀요.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우는 부모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것뿐이었죠. 더는 병원에 의사란 이름으로 있을 수가 없었어요.”

1999년 3월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그는 중국으로 넘었다. 품에는 아버지가 유언처럼 써준 편지가 있었다.

# 아버지의 유언
김 씨는 1966년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1960년대 초반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을 피해 자녀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형제들 중 그만 유일하게 북에서 태어났다.

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꿈은 법조인이 되는 것. 그러나 출신성분 제도가 엄격한 북한에서 중국 출신 부모를 둔 그가 유일한 법학부가 있는 김일성대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니처럼 사범대학에서 교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어코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 와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중 다리를 다쳐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이후 병원에서 보일러공 겸 세탁 일을 했다. 어머니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듯 했다. 딸은 꼭 병원 의사를 시키고 싶어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끝내 어머니의 뜻을 꺾지 못하고 청진의학대학 동의학부에 입학한 김 씨는 만 7년 과정을 마치고 1988년 졸업한 뒤 포항구역병원 내과의사로 배치됐다. 북에서 10년 동안 의사를 하면서 내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중병으로 집에 누워있었다.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자 오랫동안 뭔가를 깊이 곰곰이 생각하던 아버지는 편지를 한 장 쓰더니 딸에게 주었다.

“지은아, 이 편지를 병원 초급당비서에게 갖다 주어라.”

병원 초급당비서와 함께 읽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딸을 당에 바칩니다. 딸을 바치는 것으로 오랫동안 노동당원 생활을 해왔던 저의 마지막 당비를 대신합니다.”

집에 돌아온 딸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당비서가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이더냐.”

“아주 좋아하던데요.”

며칠 뒤 아버지는 다시 딸을 조용히 불러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이 편지는 네가 잘 간직해라. 언젠가 길이 생기면 꼭 가거라.”

김 씨가 편지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중국에 있는 아버지의 누이동생 등 친척들의 주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편지를 건넨 아버지는 그날부터 단 한 끼도 먹지 않고 단식을 시작했다. 온 가족이 매달려 애원하고 사정해도 끝내 아무 것도 먹지 않더니 9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 탈북
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이후 김 씨의 머리 속에는 오랫동안 의문이 맴돌았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의 편지를 내게 준 걸까?’

당시까지만 해도 김 씨는 병원에서 열심히 일해 초급당비서가 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이후 닥쳐온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의사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

초급당비서 방을 청소하다 우연히 본 서류 한 장도 그의 꿈에 절망을 심어주었다. 병원 초급당비서는 병원 종사자 중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김 씨는 북에서 당 비서는커녕 요시찰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북했다. 다시 북송됐다가도 몇 달이면 또 사라졌다. ‘중국이 어떤 곳이기에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고문을 받고도 다시 나가는 걸까’ 의아했다.

김 씨는 아버지의 편지를 꺼냈다. 아버지의 형제들, 어머니의 형제들 모두 살고 있는 중국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병원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고난의 행군 시절 무너져가는 나라를 보며 김 씨는 비로소 아버지가 남긴 편지의 의미를 깨달았다. 첫 편지는 딸이 이 땅에 살게 될 경우를 대비해 노동당에 보험용으로 보낸 것이고, 두 번째 편지는 이 땅을 떠날 상황이 되면 중국에 사는 친척의 도움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몇 년 뒤 대량탈북이 시작돼 사람들이 중국으로 줄지어 넘어가던 시절, 김 씨는 ‘이것이 아버지가 말한 길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1999년 3월 아직 얼음이 가득한 두만강을 넘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여전히 중국의 친척들을 만나 경제적 도움을 받고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 개 먹이에 받은 충격
두만강을 넘은 그가 어디로 갈지 몰라 한 중국 마을을 서성일 때 60대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오더니 “조선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밥상도 차려주고 젖은 옷도 갈아입혔다. 대량 탈북 초기 연변에는 북에서 굶주려 넘어온 탈북민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준 조선족들이 많았다.

친척을 찾기까지 거의 보름 동안 그 집에 머물렀다. 한번은 밖에 나갔더니 그릇 안에 이밥과 고기가 얼어 있었다. 김 씨가 말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저에게 매일 따뜻한 밥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새로 밥을 짓지 마시고 여기 있는 밥과 고기를 데워 먹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그건 사람 먹는 게 아니야. 개를 먹으라고 준건데, 느끼해서 잘 안 먹어.”

김 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순간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요.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던 영양실조로 죽어간 아이들의 얼굴들이 떠올랐어요. 중국은 농촌 개조차 이밥에 고기국을 배불러 먹지 않는데, 내가 지금까지 어떤 교육을 받고 세뇌돼 살아왔는지 돌아봤죠. 충격으로 그때 친척집에 가기 전까지 한 9일 동안 말을 안했던 것 같아요. 도움을 받고 다시 북에 가려 했는데 그때 그 생각이 무너져 내렸어요. 저 땅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죠.”

1960년대부터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 비단옷을 입는 세상이 공산주의다”고 규정하고,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인민을 추동했다. 그러나 인민이 받은 대가는 굶주림이었다. 반면 수정주의로 나간다며 그렇게 비판한 중국에선 개들도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있었다.

# 처음 만난 한국 오빠
1999년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 있는 고모 집에 머물 때였다. 발이 넓기로 유명한 이웃집 여인이 “내가 한국 사업가들을 여럿 아는데, 그중 한 명이 북에서 여의사가 넘어왔다는 말을 듣고 꼭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더라”고 했다.

그때까지 한국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김 씨는 거절했다. 그러나 여인이 하도 졸라대자 “북한 얘기를 하기는 자존심이 상하니, 그걸 묻지 않는 조건으로 만나보겠다”고 답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앉아있는 김 씨의 귀에 쿵쿵 큰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벌컥 열더니 싱글싱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진짜 덥다. 그쵸?”

그 한마디가 김 씨의 긴장된 마음을 녹였다.

“뭐야. 무시무시한 남조선 괴뢰도당이 아니라 흔한 동네 오빠잖아.”

남자는 갈 때까지 약속한 대로 김 씨의 자존심에 상할 말은 전혀 꺼내지 않았다.

며칠 지났을 때 이웃 여인이 시장에 가자고 하더니 비싼 옷을 사주었다.

속으로 ‘옷이 날개라고, 북에서 온 내가 이렇게 입으니 때벗이 했네’라고 은근히 좋아할 때 그 여인이 말했다.

“저번에 왔던 남자 말이야. 가면서 ‘자존심 강한 여자 같은데, 나중에 옷 한 벌 사주라’고 돈을 주고 갔어.”

김 씨는 지금도 그때 딱 한번 봤던, 처음 만났던 한국 ‘오빠’를 잊지 못했다.

“어디 사는지, 누구인지 지금도 모르지만, 1999년 룽징에서 북한 여의사 구경 왔던 남자를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이젠 70대 노인이 됐겠네요.”

# 베이징으로 가다
언제까지 고모와 친척들에게 의탁해 살 순 없었다. 친척 소개로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장(牧丹江)의 어느 마을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9개월 머물며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했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동네라 수상한 여자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갔고 어느 새벽 공안에 체포됐다. 공안들은 그의 중국어를 듣고 북에서 넘어온 지 1년 됐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북송될 운명을 걱정할 때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치보(治保) 주임이 파출소에 찾아와 안면이 있는 공안들을 만나 석방해달라고 사정했다. 치보는 중국 마을마다 있는 민경이라 할 수 있다. 공안은 ‘이곳에 있지 말라’는 석방 조건을 걸었다.

치보가 물었다.

“여기 더 있을 수 없으니 이젠 딴 곳에 가시오. 어디로 가고 싶어요?”

김 씨는 조용한 곳에 오래 숨어있긴 어려우니 도시로 가야겠다고 생각해 “베이징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치보가 베이징행 열차표와 중국돈 20원을 주었다.

“제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정말 열심히 도와줬거든요.”

베이징 기차역을 나설 때 막막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베이징 역 앞을 배회하다 치마저고리 여인이 그려진 간판을 보았다. 다짜고짜 들어가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베이징 생활이 시작됐다.

식당 일을 배워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대학에 ‘코리안푸드’라는 이름으로 도시락까지 팔게 됐다. 그러나 위생증이 없는 것이 드러나 이것도 오래 하지 못했다. 민박 청소와 빨래 등을 하다 베이징의 한 대학에 교수로 온 한국인 가정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 은인이 된 한국 여교수
한국 여교수는 김 씨보다 3살 어렸고, 5살 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남편은 한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어 베이징에 없었다.

김 씨는 여교수에게 탈북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 국제결혼을 하려다 돈을 사기당해 연변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조선족 여인이라고 소개했다.

김 씨는 그를 떠올리며 “여교수는 굉장히 높은 인격을 보여주었다”고 회상했다.

침대를 붙여 같이 자자고 청했고, 자기가 있을 때는 절대 청소를 못하게 했다. 쇼핑을 하게 되면 꼭 김 씨의 옷 등을 사와 선물했다.

여교수는 늘 “아주머니는 조금만 가르치면 공부를 참 잘할 것 같다”며 컴퓨터와 인터넷도 가르쳤다. 그렇게 안착한 듯했던 생활은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여교수가 말했다.

“이젠 계약 기간이 끝나 한국에 돌아가야 해요. 한국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는데, 아주머니는 여전히 한국에 갈 생각이 있으세요? 제가 초청장을 보내드릴 테니 우리 집에 와주세요. 한국에 가서 애 하나 더 낳으려는데 아주머니가 키워주세요.”

그 때 김 씨는 자신이 사실은 탈북한 북한 여의사라는 것, 중국인 신분이 아니라 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리 말해주셨어야죠. 제가 정말 잘해드렸을 텐데….”

“이미 저에게 충분히, 너무 잘해 주셨어요.”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서울에 돌아온 여교수는 몇 달 뒤 자기 대학에서 탈북한 학생을 찾아냈다. 그를 통해 어떻게 하면 한국에 올 수 있는지, 어느 탈북 브로커와 만나야 하는지 등을 알아냈다.

몇 달 뒤 김 씨는 여교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돈은 제가 댈 테니, 제가 알려준 브로커를 만나 한국에 오세요.”

그 덕분에 김 씨는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을 거쳐 2002년 3월 14일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 만난 여교수는 지금도 서울의 모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

“베이징에서 키웠던 5살 아이가 이젠 20살이 훌쩍 넘었죠. 지금도 우리 둘은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김지은 씨가 지난해 한국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인도를 찾아가 현지 주민들을 상담해주고 있다. 김지은 씨 제공.



# 유서
2003년 어느 날, 김 씨는 혼자 눈물을 흘리며 유언장을 써내려갔다.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 디딘지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정말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국에 오자마자 사기를 당해 정착금을 모두 잃었다. 많은 탈북민이 그랬듯 그도 정착하자마자 교회에 다니게 됐다. 한 여인이 언니라고 부르라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직 직업이 없지. 집에 앉아 놀면 뭐해. 네트워크 사업을 하는 곳이 있으니 거기 다니면 한국 사람도 많이 만나 정착도 빨리 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어.”

김 씨는 네트워크 사업이 최신 기술을 다루는 회사인 줄 알았다. 자기 시간을 활용하며 공부도 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전 재산을 잃는 데는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자살까지 결심한 데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탈북민이 한국에 오면 한국 정부는 북한 학력 인정 서류를 발급해 준다. 김 씨도 의대 졸업과 의사 경력을 인정받아 교육부에서 발급한 “한국에서 6년제 의대를 나온 자와 동등한 자로 인정한다”는 경력서류를 받았다. 이 서류로 의사 국가고시를 보려 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북한 경력으로 고시를 볼 수 없으니 의대를 다시 다녀야 한다”고 했다. 의대에 입학하려 서류를 냈더니 이번엔 교육부에서 “한 사람이 같은 전공을 두 번 공부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당시 법으론 의사 고시를 볼 수도, 의대를 다닐 수도 없는 처지가 돼 한국에서 의사를 하겠다는 김 씨의 꿈은 허물어졌다.

“북에 가서 의대 졸업증과 의사 증명서를 갖고 오라더군요. 한국에 와서 거짓말탐지기까지 통과하며 인정받았는데 북한 서류를 갖고 오라니 황당했죠. ‘그럼 북에 가서 증명서 갖고 올 테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따졌더니 그건 또 못한다고 하더군요.”

살아갈 의욕을 잃었다.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던 시기였다.

# 살아야 할 이유
유서를 쓰면서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살면서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있었던가를 돌아봤다. 중국에서 두 번씩 체포돼 북송 위기에 처했을 때도 죽지 않았는데, 지금은 따듯한 집도 있고 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데 왜 죽을 생각이 드는지 반성했다. 그리고 그는 살아야 할 이유 네 가지를 찾아냈다.

첫째는 죽을 생각이 드는 것은 자존심과 욕심 때문이라고 결론 냈다. 한국에 와 “나는 의사가 안 되면 안 돼”라는 생각이 좌절을 부른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가 꼭 의사가 돼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 일반 회사라도 다니면 되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두 번째는 “중국에서 한국에 오지 못하고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는 탈북민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행운으로 한국에 일찍 와놓고, 죽을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다른 탈북민들 눈에는 ‘놀고 있네’라고 비춰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자존감이었다. 북한에선 탈북민을 배신자라고 하는데, 꼭 여기서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 “나는 누구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보고 왔으니 우리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앞선 세 가지보다 더 큰 이유가 네 번째였다. 김 씨는 북에서 남들처럼 20대 중반에 결혼했다. 1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지만, 아들이 태어났다. 이혼할 때 시댁은 마음을 바꿔 돌아오라며 아들을 내놓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 싶었고, 그 아들이 “엄마는 날 버리고 혼자 한국에 가서 무책임하게 죽었다”고 평생 원망할 거라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죽음의 유혹을 이겨냈다. 의사 대신 한국의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나니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풀리고 미소가 돌아왔다.

회사를 다니며 사람들과 친해지자 사장과 이사들이 오히려 더 격려했다.

“당신이 한국에 와서 의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들으니 너무도 불합리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다. 싸워야 한다.”

그들의 주선으로 그는 2004년 10월 국회 국무조정실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가 진술했다. 그랬더니 의대 입학 허가가 났다. 의사 경력이 있으니 예과 2년을 건너뛰고 본과 4년만 다니면 된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몇 년 뒤엔 북한 의사 출신이 한국 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대학에 몇 년 다니던 때라 그는 시험 대신 대학 졸업을 선택했다. 김 씨는 남북에서 의대를 나온 흔치않은 경력을 소유하게 됐다. 그의 노력으로 이후에 온 다른 탈북 의사들은 의사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2009년 2월 세명대 한의과대학 졸업식에서 꽃다발을 가득 받아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지은 씨. 김지은 씨 제공



# 상봉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2009년 대학을 졸업했고, 그해 부천에 한의원을 열었다. 북한에서 의대 동의학과를, 한국에서 한의대를 나온 그에게 언론은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2017년 한의원을 서울로 옮겼다. 받은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2014년부터 요양원 봉사도 매주 나갔다.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 등 해외 치료봉사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성공한 탈북민’이 됐고, 인터넷엔 그를 다룬 기사들이 쌓여갔다.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한 일은 아들과의 상봉이었다.

아들이 13살 때 사람을 시켜 두만강까지 데려온 뒤 엄마에게 오라고 설득했다. 한국에 있다는 소리는 할 수 없어 “엄마가 너무 멀리 있어 갈 수 없으니, 엄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네가 오는 길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아들은 할아버지와 살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랬던 아들이 19살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나 지금 가도 돼?”

“그럼, 그럼.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뀌었니?”

“공식적인 이유를 말할까, 비공식적인 이유를 말할까? (“둘 다 말해줘.”) 음. 공식적으론 살아보니 여기선 미래가 없더라고. 열심히 공부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한계가 있더라고. 비공식적인 이유는 한국 가면 승용차를 가질 수 있고 송혜교, 이지아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두 연예인은 그때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던 한국 드라마 주인공들이었다.

그렇게 몇 달 뒤 아들이 왔다. 조사기관에 들어가 만남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전화통화는 가능했다. 김 씨는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늘 꿈 꿔오던 스스로의 미션이기도 했다.

전화 말미에 “아들, 사랑해”라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북에선 사랑한다는 말을 연인 사이에서도 잘 쓰지 않는다.

며칠 뒤 다시 통화가 되자 그는 또 “아들, 사랑해”라고 말했다. 이번엔 전화기 너머 자기도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어, 어, 어”하는 짧은 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째 통화에서 또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번엔 “예, 나도요”라는 대답이 날아왔다. 그는 인생 최대의 기쁨을 느꼈다.

하나원을 졸업하고 아들이 집에 온 날 그는 6살 때 헤어진 아들을 품에 안고 온 밤을 지새웠다. 14년 만의 재회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법조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 씨를 기쁘게 한 건 엄마를 너무나 아끼는 아들, 목표와 실천이 확실한 성실한 청년의 모습으로 자라줬기 때문이다.

# 인생은 마라톤
김 씨는 지난해 말 운영하던 한의원을 접고 경기도의 한 한방병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병원 원장으로 진료를 하고, 단골 고객을 관리하다보니 공부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그는 올해 서울 소재 한 법학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중학생 시절의 꿈이 이끈 것일까. 의사가 법학박사를 꿈꾸는 이유가 궁금했다.

“돈을 버는 것보다 통일될 한반도를 위해 뭔가 기여하는 게 남북에서 의사로 살아본 제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와서 부자가 될 것도 아니고, 될 수도 없는데, 돈은 살만큼 벌면 되잖아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남북한의 의료통합도 중요한 문제가 될 거예요. 미리 한국과 북한의 의료법과 규제를 공부해 어떻게 합리적인 통합 체계를 만들지를 고민해야죠. 한국에 먼저 온 사람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지렛대가 되고 싶어요.”

그는 삶을 마라톤에 비유했다.

“마라톤은 꼴찌를 해도 박수를 받는 종목이잖아요. 시작하자마자 앞서 간다고 1등이 아니고, 마지막을 빨리 간다고 해도 1등이 안돼요. 누가 나를 앞질러 가도 조급해 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를 갖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완주하는 게 중요하죠. 주저앉지만 않고 계속 가면 경기장에 들어갈 것이고, 등수와 상관없이 누군가는 나를 기다렸다 박수를 쳐주지 않겠어요. 그건 포기하지 않고 와준 과정에 대한 찬사라고 생각해요.”

김 씨의 마라톤 예찬을 들으며 과연 그는 지금 마라톤 코스의 어디쯤에서 뛰고 있을까 상상했다. 반환점은 돌았을까. 그가 생각하는 결승점은 어디일까.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에 법학박사까지 받으면 경기장이 보이는 것일까.

고백한다면 기자는 그와 하나원 동기이다. 18년 전 우리는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하나원을 나와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취재수첩을 닫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 말을 건넸다.

“우리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죠?”

“그러게. 정말 열심히 달려왔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온갖 사연을 머금은 눈빛이 수천 마디 말을 대신해 허공에서 만났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