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일류 정신 기립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례 이틀째인 26일 오후 대구 중구 인교동에 위치한 옛 삼성상회 건물 앞에서 류규하 대구 중구청장과 주민들이 고인을 기리는 추모식을 열었다. 이곳은 이병철 창업주가 1938년 삼성을 처음 시작한 곳이다. 대구=뉴시스
26일 서울대 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나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 등에선 전날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리더십을 조명하는 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운이었을까, 통찰이었을까. 반도체 진출의 진실이 정말 궁금하다”라거나 “착한 기업, 나쁜 기업의 프레임은 이분법적이다. 기업이 돈 많이 벌어서 일자리 많이 만들어주면 그게 착한 기업”이란 글이 눈에 띄었다.
이 회장이 별세한 지 이틀째. 재계와 학계,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이건희 신드롬’이 다시 불고 있다. 특히 2030 젊은 층 사이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는 가운데 취업난에 지친 젊은 층에는 고인의 ‘초일류 성공신화’가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일자리 많이 만들면 착한 기업”… 이건희 다시 주목하는 젊은층▼
2011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2011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임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는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세계 1위 제품과 삼성전자 제품의 기술력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만든 행사다. 삼성전자 제공
“지금 어느 누가 정치나 사회에 소신 발언을 할 수 있을까요. 이건희 회장의 ‘사이다 발언’이 그래서 더 주목받으면서도 아쉬움이 큰 것 같습니다.”
26일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이건희 신드롬’이 확산되는 배경에 대해 이같이 분석했다. 그는 “언젠가부터 기업인은 익명이나 경제단체 뒤에서 발언할 뿐 소신 발언을 쏟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정치력은 4류”라거나 “(정부의 경제 성적이)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한 발언 등을 두고 한 말이다.
○ 2030 젊은 층 “신선한 이건희 리더십”
특히 2030 젊은 층의 이건희 회장의 성과에 대한 관심이 높다. 직장인 김지혜 씨(36)는 “이 회장에 대해 사실 잘 모르다가 별세를 계기로 반도체나 스마트폰 탄생 스토리를 알게 됐다”며 “삼성에 대한 종합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자랑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온라인 주요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돈 많이 벌고 일자리 많이 만들어주면 그게 착한 기업”이란 글이 눈에 띄었다. “삼성이 일본 전자제품을 앞지를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기를…”과 같은 글들이 적지 않았다.
정치인들 중 일부가 이 회장의 별세를 애도하면서도 “삼성이 과거의 잘못된 고리를 끊고 새롭게 태어나길 바란다”고 발언하자 “기업인들의 성과를 무너뜨리지 않는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비판 글이 이어졌다. 25일부터 열린 삼성 온라인 추모관에도 오후 3시 기준 삼성 계열사 구성원들의 댓글 1만7500여 개가 달렸다.
○ “꿈과 희망이 그리운 시대”
이건희 신드롬은 코로나19 사태에 여러 규제로 혁신이 실종된 시대라 더 큰 반향이 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취업난 등으로 일상에서 ‘거절’의 홍수 속에 살아 온 20, 30대 젊은 층에서 초일류를 일궈낸 삼성의 기업사가 새롭게 다가온다는 반응이 많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은 많은 사람들과 기업들에 ‘삼성이 했으니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과 희망을 줬다”며 “취업난에 지친 20대 청년들은 과거 기업의 성공 신화와 성장 시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2000년대 초에도 이건희 신드롬이 불었던 적이 있다.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넘어서 정보기술(IT)을 바탕으로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희망이 넘치던 시대였다. 당시 이 회장은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 순위에서 1등을 하곤 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코로나19 사태와 오랜 저성장 속에서 이 회장처럼 미래를 내다본 강력한 리더십을 바라는 기류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랫동안 반기업 정서 속에 한국 기업인의 리더십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이 회장 별세를 계기로 다시 주목받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도 한국 경제계에서 이 회장에 필적할 만한 리더십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뜨는 IT 기업도 있지만 삼성처럼 명실상부하게 글로벌 1등이 된 곳은 드물다. 오랫동안 기업의 잘못한 부분이 부각되다 새로 알게 된 삼성의 ‘글로벌 신화’가 젊은 층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서동일·홍석호·곽도영·허동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