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허리케인 ‘도리안’ 피해를 시찰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탑승한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왼쪽).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여파로 본인 또한 다음 달 3일 상원선거에서 4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렸다. 사진 출처 린지 그레이엄 의원 페이스북
하정민 국제부 차장
급기야 그레이엄의 지역구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찾은 트럼프는 유세장에서 앙숙의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해 버렸다. 트럼프 지지자의 비난 문자가 쇄도하자 그레이엄 역시 전화를 믹서에 갈고 골프채 목검 식칼 등으로 내리치는 동영상을 제작해 뿌렸다. 누가 봐도 타격 대상은 전화가 아닌 트럼프였다.
이랬던 둘의 관계는 트럼프 집권 후 극적으로 변했다. 그레이엄은 두 차례의 대통령의 탄핵 위기 때 공화당 어떤 의원보다 적극적으로 엄호에 나섰다. 늘 주군의 직무수행 능력과 유머 감각을 칭송했고 그 옆에서 ‘내가 이 순간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낯간지러운 말까지 했다. 민주당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서란 이유를 대긴 했지만 정치는 생물이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다음 달 3일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레이엄 역시 같은 날 상원 선거에서 본인의 4선이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다. 몇 달 전만 해도 70%가 넘는 지지율로 흑인 법조인 출신인 40대 정치 신예 제이미 해리슨 민주당 후보에게 넉넉히 앞섰지만 최근 조사에서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선거자금 모금은 오히려 크게 뒤져 막판 선거전에서 쓸 실탄이 부족한 상태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백인 보수층이 많은 미 남동부를 뜻하는 ‘딥사우스’의 핵심 지역으로 아직도 스스로를 ‘미국인’ 이전에 ‘남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15년 공화당 소속 니키 헤일리 당시 주지사가 공공장소에서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상징이었던 남부연합기를 퇴출할 때도 거센 반발이 있었다. 또 매케인, 밋 롬니, 밥 돌 등 백악관 주인이 되지 못한 공화당 대선후보조차 이곳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쉽게 이겼을 정도로 공화당 텃밭으로 꼽힌다.
이런 곳에서 집권당 중진이 야당의 무명 정치인에게 고전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리슨 후보는 그레이엄을 공격할 때 주(州) 내 경제 상황 등이 아닌 트럼프 행정부의 인종차별 정책,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 등을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트럼프 아바타를 몰아내자”는 식이다. 반박하자니 지난 4년간 대통령 지근거리에 있었던 게 사실이라 “나와 대통령은 다르다”고 받아치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즉 대통령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특정 정치인이 누릴 수 있는 권력도 커지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브랜드는 휘발되고 대통령 수족이라는 이미지만 남는다. 주군의 인기가 높을 때는 큰 상관이 없으나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 이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본인의 정치 생명마저 갉아먹는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