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핵심은 자기성찰에 따른 자기부정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내놓은 이론도 허점이 보이면 과감하게 새 이론으로 바꿨습니다. 낡은 이론도 더 낫게 만들려고 씨름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집이 센 학자들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의 저술을 연대별로 보면 자기부정의 반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쓴 논문, ‘분석에 있어서 구성의 문제’에서 그는 기존의 입장을 부정합니다. 분석의 목적이 잊혀진 개인사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피분석자의 생각과 감정이 통합되어 편안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과거사의 회복, 재건이 아닌, 개인사의 통합을 강조한 겁니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입니다. 분석을 고고학적 발굴에 비유했던 생각을 뒤집은 겁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이렇게 했다는 것은 그가 천재였다는 증거입니다.
고집불통인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살기 힘들어집니다. 고집을 부리면서 소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생각하는 기능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누구의 생각도 절대 완벽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고쳐나가지 않으면 고집불통의 늪에 빠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일을 두고 흑과 백으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TV 화면에서 자주 보는 말싸움 장면에 이제 더 놀랄 여유도 없습니다. 다만 피곤하고 지칠 뿐입니다. 해결을 해야 할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그렇게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으니 전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정치의 세계에서는, 과학의 세계도 아닌데 진실을 찾으려고 그렇게 다투고 있는가? 진실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인가? 혹시 진실과는 거리가 있어도 그것이 쓰임새가 있다면 적어도 가끔은 받아들이고 타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치가 절대적 진실을 추구한다면 결국 흑과 백만이 남습니다. 다양한 색조의 중간 가치들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모두 사라집니다. 끝이 안 보이는 ‘진실 게임’에서 벗어나 실용주의로 갈 수는 없는 것일까? 전망은 여전히 회색빛입니다.
정신분석가들도 소속 ‘정당’이 있습니다. 대표로 모시는 분들은 프로이트, 클라인, 코헛, 위니컷, 비온, 페어베언, 설리번 등 여럿입니다. 다른 학파의 분석가들은 청중이 있는 공식 모임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피분석자와 단 두 사람이 만나는 상담실 안 풍경은 어떨까요? 자신의 이론적 주장과 달리 지금 현재 이 피분석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이론이 어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을 매섭게 공박했던 분석가가 받드는 이론이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좋은 분석가임을 알고 있는 겁니다.
끝없이 깊어가는 우리 사회의 분열은 지도자들이 자신이 속한 정당을 편들기보다는, 국민의 행복과 복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해결이 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일이 되려면, 지도자들이 한 생각에 매몰되어 있음을 일단 인정하고, 쓸데없어 보여도 다른 편의 다른 생각도 한번 생각해 보는 겁니다. 단, 옳고 그름의 판단을 처음부터 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다른 관점에서 연다면 여러 사람 팔자가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그러면 고집불통의 첫 번째 껍질 정도는 벗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