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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삼성맨의 애끊는 추도사 “염려 놓고 편히 가십시오”

입력 | 2020-10-28 03:00:00

[前 비서실장 이수빈 삼성상임고문 추도사]사업보국 열정과 통큰 결단 그립습니다




이수빈 고문

이건희 회장님.

며칠 전만 해도 제가 회장님의 추도사를 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회장님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다니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50만 삼성 임직원 모두의 기도와 염원이 무너져 내리는 이 슬픔을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국민이 이제사 당신이 우리나라를 세계 일류로 만든 공을 기리며 애도의 물결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님.

당신께서는 모든 것에서 일등의 신화를 만들어 오셨습니다. 레슬링, 탁구, 승마, 골프 등 무슨 운동이든 하셨다 하면 프로급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의 건강관리는 왜 그렇게 소홀히 하셨습니까? 왜 프로가 되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비서실장으로 회장님을 가까이 모시며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앞을 미리 내다보는 선견력, 통 큰 결단력, 남에 대한 배려, 심사숙고와 인내심, 과단성 등은 보통 사람이 넘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회장이 되셔서 얽히고설킨 가족관계의 지분 정리를 할 때 형제들을 배려하며 통 크게 결단을 내리신 일.

세계 반도체 경기가 나빠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투자를 머뭇거릴 때 기흥 반도체 제5라인 시설에 과감한 투자를 결단하신 일.

사장단 회의에서 매출이나 영업이익 같은 유인물에 나오는 보고는 하지 말라.

사장들보다 더 유능한 인재를 데려오라.

여대생을 공개 채용하라.

해외 지역 전문가를 양성하라.

일등 제품으로 승부하라.

업의 개념을 알고 일하라.

위기의식으로 정신을 차리라며 다그치시던 그 엄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장단 회의를 하실 때 제가 사장단의 의중을 모아 ‘질도 중요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라고 했다가 혼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회장님께서는 그룹의 큰 방향을 그리셨고, 구체적 경영은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맡기시고 자율경영을 실천하셨습니다.


회장님은 엄하면서도 유연한 사고로 삼성 조직을 이끌어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셨습니다. 남들은 흔히 회장님을 기인으로, 약간 이상한 몽상가로 비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장님의 진면목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임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보다 10년 이상 앞을 내다보시며 하시는 말씀이기에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고를 거쳐서 입체적으로 다면적인 질문을 쏟아 내시니 사장들은 늘 당황하고 쩔쩔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여러 사람 앞에서는 말이 어눌하고 수줍어하시지만 소수와 만난 좌담의 자리에서는 놀랄 만한 해박한 지식과 언변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며 몇 시간이고 화제를 이어갈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회장님의 화두는 우리 삼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던지시는 화두는 화제의 대상이 됐고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높여 주었습니다. 기업인으로서 사업보국의 신념을 늘 잃지 않으셨습니다.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시던 그 열정, 그리고 유치가 결정된 현장에서 보인 감격의 눈물은 아마도 평생 처음 흘리신 눈물이실 것입니다.


이번에 회장님에 대한 외국 인사들의 높은 평가와 칭송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여 주었습니다. 이는 우리 국민의 자긍심을 한껏 높여준 일로 국민 모두는 감사의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님.

이제 저희 곁을 영영 떠나시지만 홍라희 여사님을 비롯한 세 자제분이 건재하시고, 특히 이재용 부회장이 충분히 삼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과 경륜을 쌓았기 때문에 염려를 놓으시고 편히 가십시오. 이 세상에서 짊어지셨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저세상에 가셔도 삼성과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항상 지켜주소서.


이수빈 삼성 상임고문 약력△1939년 경북 성주 출생 △196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삼성그룹 입사 △1977년 제일모직 대표이사 △1985년 삼성생명 대표이사 △1991년 삼성 회장 비서실 비서실장 △1993년 삼성증권 대표이사 회장 △1995년 삼성생명 대표이사 회장 △2020년 삼성경제연구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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