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회장 타계]‘반도체 거인’ 이건희 회장 영결식 화성사업장 거쳐 선영에 안장
임직원 배웅 받으며… 25일 별세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영결식 및 발인이 28일 엄수됐다. 이날 화성반도체사업장을 돌아 나오는 운구차를 향해 도열한 삼성그룹 임직원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다. 화성=뉴시스
오전 9시부터 5000∼6000명의 임직원이 화성사업장 도로 양편에 서서 고인을 기다렸다. 이 회장이 생전 마지막으로 기공식(2010년)과 준공식(2011년) 행사에 참가했던 제16라인 공장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등 유족이 고인의 영정 사진을 들고 내렸다. 방진복을 입은 임직원들이 웨이퍼를 들고 유가족을 맞았다. 유족들은 고인이 16라인 공장을 방문했을 당시의 영상을 함께 지켜본 뒤 다시 차에 올랐다. 운구 차량은 이후 경기 수원시 가족 선영으로 향했다. 한국 최대 글로벌 기업을 일궈낸 거목은 영면에 들어갔다.
이 회장의 영결식은 이날 오전 7시 20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홍 전 관장과 이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과 함께 고인의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아들 정용진 부회장, 조카인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이 참석했다. 빈소를 세 차례 찾았던 조카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이날 불참한 대신 부인 김희재 여사와 아들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이 영결식을 찾았다.
▼ “반도체 신화 이어가겠습니다”… 임직원들 3000송이 국화로 배웅 ▼
‘반도체 성지’ 수원에 영면
한국 최대 글로벌 기업을 일군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마지막 출근길은 ‘반도체의 성지’였다. 1974년 주변의 만류에도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후 평생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기틀을 닦은 고인은 반도체 사업장에서 임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28일 오전 고 이건희 회장의 운구차량이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이날 5000∼6000여 명의 임직원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고, 사업장 곳곳에는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초일류 삼성전자의 이름이 더욱 빛나게 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화성=뉴시스
화성사업장 곳곳에는 ‘회장님의 발자취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반도체 100년을 향한 힘찬 도약을 회장님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반도체 신화 창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 삼성 임직원 “잊지 않겠습니다”
화성사업장을 찾기에 앞서 오전 8시 20분 고 이건희 운구 차량은 이 회장이 거주하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과 이태원동 승지원, 리움미술관을 차례로 들렀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6년 5개월 만에 ‘귀가’한 셈이다. 승지원은 삼성그룹의 영빈관으로 이 회장은 이곳을 집무실로 주로 사용했다. 좌우명이자 선대 회장이 선물한 ‘경청(傾聽)’이란 휘호, 고인이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게 선물한 ‘삼고초려’ 그림도 이곳에 걸려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화성사업장뿐만 아니라 삼성 계열사 곳곳에서 많은 임직원이 숙연한 분위기에서 고인을 애도했다. 서울 서초사옥에는 조기가 걸리기도 했다. 조문하지 못하는 임직원을 위한 삼성 온라인 추모관에는 14만여 명의 임직원이 방문해 3만여 개의 추모 글을 남겼다.
한 삼성전자 직원은 “코로나19로 대부분의 직원은 빈소에 들르지 못했다. 외부에서 볼 때 공과 과가 있다 하더라도 삼성에서 고인은 특별한 존재였다. 우리는 마음으로 애도하고 있다”고 했다.
고인은 오전 11시 55분 장지인 경기 수원시 선영에 도착해 영면에 들었다. 장지는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뜻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 선산은 이 회장의 조부모와 증조부모 등이 묻힌 곳이다. 발인에는 이학수 최지성 전 삼성전자 부회장, 권오현 상임고문, 김기남 부회장, 정현호 사장, 이인용 사장 등도 함께했다.
○ 반도체 초석 닦은 이건희 회장
고인의 운구가 마지막으로 반도체 사업장을 찾은 것은 평생 반도체에 대한 애착과 긍지가 컸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1974년 이 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했을 당시 삼성 경영진은 “TV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반도체를 만든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라며 반대했지만 이 회장은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이 회장은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산업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본 이 회장의 눈에 띈 사업이 반도체였다.
이 회장은 종종 반도체 산업의 핵심을 ‘타이밍’이라고 표현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해 수조 원에 이르는 선행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사업에서 최적의 투자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피를 말리는 고통이 뒤따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기도 했다.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순간은 경기 용인시 기흥구 반도체 사업장에 8인치 웨이퍼 양산 라인 도입을 결정하던 1993년이었다. 당시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표준이었다. 8인치를 택하면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지만 기술적 부담이 컸기 때문에 경쟁사 모두 머뭇거리던 때였다.
한 번의 실패로 수조 원 이상의 자금을 허공에 날릴 수도 있었다. 이 회장은 ‘머뭇거리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이 선택으로 삼성전자는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 1위 기업이 될 수 있었다. 일본 도시바 등과 기술력은 비슷했지만 생산력에서 앞선 삼성전자는 1993년 10월 메모리 시장 1위에 올라섰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 최고경영진과 임직원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목표를 뒤쫓아 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세계의 리더가 되면 목표를 자신이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리더의 자리는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치열한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임직원들에게 한 당부였지만 이 회장 스스로를 다지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고인은 글로벌 시장에서 압도적 1위를 자랑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닦았다.
김현수 kimhs@donga.com·서동일 dong@donga.com·곽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