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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文정권이 애용하다 버린 게 윤석열뿐이랴

입력 | 2020-10-30 03:00:00

그토록 추켜세웠던 윤석열 짓밟듯
文 정권 초반 한때 숙의민주주의 강조
하지만 그 후엔 의석수 밀어붙이기 독주
숙의·삼권분립·권력견제 결핍된 다수결은 민주주의 존립 근거 자체를 무너뜨려




이기홍 논설실장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그래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럴 때 계면쩍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정권 사람들은 부끄러움이나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하다.

이 정권이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가 하루아침에 짓밟는 대표적 사례는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2017년 5월 검사장도 아니던 그를 서울중앙지검장에 발탁하고 2019년 검찰총장으로 도약시킨 직후까지, 2년여 동안 집권세력과 그 주변 나팔수들이 윤 총장에게 바쳤던 찬사를, 요즘 그들이 쏟아내는 헐뜯기와 비교해보면, 수오지심 DNA가 제거된 ‘신인류’를 보는 듯하다.

저들이 반짝 애용하다 버리는 대상은 사람만이 아니다. 가치와 도덕률도 한껏 강조하다 불편해지면 내버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숙의민주주의’다. 이제는 낯선 단어처럼 들리지만 숙의민주주의는 이 정권 초기엔 문재인 대통령의 덕성으로 강조됐던 때가 있었다.

“80대 어르신부터 20대 청년까지…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타인의 입장을 경청하는 숙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지혜롭고 현명한 답을 찾아주셨습니다…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반대 의견을 배려한 보완대책까지 제시하는 통합과 상생의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2017년 10월 22일 문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 관련 입장문’이다. 정권 출범 직후 문 대통령은 대선공약인 신고리 5, 6호기 폐쇄가 반대에 부딪히자 공론화 작업에 부쳤다. 471명의 시민참여단이 3개월간 논의한 끝에 건설 재개로 결론이 났다. 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대선공약 철회 비판 가능성을 무릅쓰고 공론화위의 결론을 수용했다.

이날이 이 정부에서 숙의민주주의가 싹튼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 아닐까. 여권은 숙의민주주의를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고, 숙의의 정반대 방향인 독주로 치달았다.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토론을 통해 접점을 찾아가는 숙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 진화한 형태가 아니라, 민주주의 존립에 필수불가결한 핵심 가치다.

여권은 ‘다수결 원칙’ 하나면 다 되는 듯 행동하지만, 민주주의는 소수의견 배려, 삼권분립, 권력견제라는 원칙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다수결 제도는 민의 대변에 허점이 많아 가중다수결(qualified majority vote)이 시행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회의 경우 표준안건 의사결정은 회원국 중 55%(강화심의 안건은 77%)의 찬성과 동시에 그 55%가 27개 회원국 전체 인구의 65%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찬성 회원국 수와 인구요건을 함께 충족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권은 그저 과반수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밀어붙이더니, 이젠 그 공수처법마저 더 사용하기 편하게 바꾸려 한다.

다수결이면 뭐든지 적법하다는 발상은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조차 모른 채, 오로지 혁명도구로서의 민주주의만 학습한 결과물이다. 20세기 전반기 나치즘 파시즘은 물론 우리 현대사의 독재정권들도 모두 외형상 다수결의 형식을 밟아 뜻하는 바를 관철시켰다.

더구나 다수결 정치가 민주주의의 더 근본적인 핵심 가치인 삼권분립과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면 다수결 원칙의 존립 기반인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이 된다.

의석수가 많다고 사법부와 헌법기관들의 요직을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법치주의의 근간인 검찰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디딤돌 자체를 무너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국정감사에서 자신들이 원치 않는 증인은 다 거부해버리는 것 역시 입법부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대통령은 협치를 외치지만 협치와 숙의의 대원칙이 ‘권력자 우선 양보’, 즉 힘 가진 쪽이 먼저 양보하는 것이라는 점을 진정 모르는지 의문이다.

세계역사는 설령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권이라도 다수결의 힘으로 자신들에게 불편한 것들을 개정하고 또 개정하는 행태를 반복하면 종착역은 전체주의로의 회귀임을 증명해왔다. 숙의·삼권분립·권력견제 같은 핵심 원칙이 결핍된 민주주의는 파시즘으로 흐를 수 있다.

파시즘은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통치수단으로 삼는다. 공동체 내 특정 세력을 표적으로 공격해 과반 이상 국민의 ‘쌤통심리’를 충족시켜 준다. 특정 계층을 때리고 빼앗아 나머지 다수에 혜택을 나눠줘 표를 사는 정치는 소수를 배려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행위다.

‘집착’과 ‘표변’. 어찌 보면 배치되는 두 특질을 이 정권은 모두 갖고 있다. 남북관계 민족 분배 등에 대해선 수십 년째 낡은 세계관을 편집증에 가깝게 밀고 가지만, 인재와 가치는 수시로 편취했다가 버린다. 그렇게 표변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진영 내에서 한두 명만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집단적 수치심 마비’인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