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사람이 자리 차지하는 현실 조직이 ‘비극’ 겪게 되는 주된 이유 개인도 인생 낭비하며 자존심에 상처 지금은 인재가 실력 발휘해야 할 때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2002년 10월 어느 날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토니 블레어 총리와 에스텔 모리스 교육부 장관.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에 따른 후속 만남이었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팀장이나 임원을 찾아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면 리더들이 긴장한다. 대개 그만두겠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공직자도 직장인과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날 블레어 총리는 사임하겠다는 장관을 따로 불러 한 시간을 독대하며 만류했지만 장관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다음과 같은 사임의 변을 남기며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유는 무능함! 막중한 장관직을 계속 수행하기엔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관이 그렇게 평한 게 아니라 스스로 무능하다며 사임하겠다는 거다. 당시 나는 신문에서 이 기사를 오려 사무실 책상 뒤편에 붙여 두고 오래 들여다봤는데 모리스 장관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기 고백이며 스스로를 엄하게 돌아보는 자만이 가능한 고급한 선택이니 말이다. 나 또한 언젠가 퇴직하게 된다면 이 이유로 그만두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몇 년 후 그렇게 했다.
내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오래도록 일하던 회사에서 부사장 3년 차를 맞았을 때였다. 디지털의 파고는 광고회사에도 위기를 가져와 장래의 먹거리를 새로 찾아야 하는 과제가 무거웠다. 내 입장에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내겐 그런 능력도 의지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부족한 사람이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우선 조직에 민폐를 끼치는 일이고 내 인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해 여름 회사에 그만하겠다는 의사를 전했고 연말에 퇴직했다. 그 후 몇 번인가 돌아봤다. 그때 그만둔 것이 잘한 일이었는지를. 결단코 잘한 일이었다. 나는 조직에서 받는 것 이상으로 기여하고 싶었고, 잘 쓰이고 싶었으며, 분명한 역할을 갖고 일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며 일하는 거라 생각했다.
능력이 처지는 사람들이 도처에 앉아 물러날 생각을 않는다. 성장이 더뎌진 우리 사회는 많은 분야에서 공급은 넘쳐나는데 수요가 따르지 않는다. 인재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가 쑥쑥 성장할 땐 옥석을 가리지 않아도 그런대로 굴러갔지만 지금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자리를 맡아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양심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자존심을 지키라는 뜻이다. 모자란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 한 번뿐인 인생을 주위에 해를 끼치며 지내는 것, 결국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 것이 괜찮으냐고 한 번쯤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거다. 우리 각자가 자존심을 지키고 존엄함을 찾으려 애쓴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한결 나아질 것 같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